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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공모전 입상작

학교비정규직 작품공모전 입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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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공모전 입상작

2021 학교비정규직 작품공모전 안내 사진
중요 2021 학교비정규직 작품공모전 안내 [ 학교비정규직 작품공모전 안내 ]     올해 7월에서 8월에 걸쳐 진행되었던 “비정규직 노동자의 목소리를 내다”라는 주제로 학교비정규직 작품공모전이 드디어 마무리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학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겪는 차별과 서러움, 여성노동자로서 겪는 일과 가정, 돌봄 등의 어려움, 나아가 이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한 수기와 시, 그림, 사진 등을 통해 잘 전달해주셨습니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 공모전에 응모된 총 76건의 작품 중 22분이 입상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심사위원은 수기 부문에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님, 시 부문에 이상임 시인님, 최종 심사로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박미향 위원장님이 수고해주셨습니다.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앞으로 열릴 공모전에도 관심 가져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노조에서도 지금 모인 작품들이 많은 사람에게 가닿을 수 있도록 더 고민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부 이름 직종 부문 대상 경기 유미향 돌봄전담사 수기 최우수 경기 권윤숙 조리실무사 수기 전남 이옥랑 특수교육실무사 수기 우수 전남 김현희 돌봄전담사 수기 인천 안성미 조리실무사 수기 경남 정수진 조리실무사 수기 경기 김은희 돌봄전담사 시 장려 울산 곽영미 조리실무사 수기 경기 권점늠 미화 수기 전남 김서현 행정실무사 수기 서울 김숙희 조리실무사 수기 광주 노미춘 조리실무사 수기 부산 노정숙 조리실무사 수기 인천 방애경 유치원교육실무사 수기 경북 윤정희 조리사 수기 대구 이준길 운동부지도자 수기 경남 임하정 영어회화전문강사 수기 부산 최낙숙 조리실무사 수기 경기 김은주 특수교육지도사 시 서울 민현순 교무행정지원사 시 부산 김수진 방과후전담사 그림 경기 박양미 조리실무사 그림                  < 17차 정기중앙위원회에서 진행된 시상식 사진>       심사평     심사의 말씀   최현숙 / 구술생애사 작가   글쓰기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 즉 생각과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남이 읽어주기를 원하는 글이라면 읽는 이에게 뜻이 잘 전달되도록 글을 매만지는 것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잘 쓰는 글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들이 있겠지만, 저는 관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건과 상황과 사람에 대해 남의 위치와 시선이 아닌 나의 위치와 시선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과 질문을 잘 풀어낸 글이야말로 진정한 “나의 글”이며, 그런 글은 혹 아직 잘 매만져지지 않았거나 문법과 맞춤법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더없이 매혹적인 글이라 생각합니다.   노동현장 뿐 아니라 그와 직결된 여성 개인과 가족 및 사회생활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들을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저 뿐 아니라 이 글들을 읽는 모든 분들이 많은 공부와 성찰과 질문들을 얻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결혼과 출산으로 경력단절이 된 후 다시 나온 사회에서 여성들이 부딪치는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 일 가정 양립의 어려움, 급식현장의 바쁘고 고된 노동 내용과 위험과 근골격 질환을 비롯한 갖은 질병과 사고들, 학교와 유치원 돌봄 현장 노동의 세세한 내용들, 미화원 노동자에 대한 체력검사 과정에서 겪은 모욕감, 비혼과 이혼과 사별로 한 가정의 생계부양자는 물론 부모 돌봄까지 도맡게 되는 여성의 생애, 남성 노동자가 학교 복싱 교육자로서 하는 제언, 급식 조리사에서 시작해 진보정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한 경험 등, 제게는 모든 글들이 중요한 공부거리였습니다. 심사위원 제안을 받았을 때 학교비정규직의 다양한 현장 노동자들의 말과 느낌과 노동 내용 및 노동조합과 개인의 성장과정을 배우게 되리라 기대했던 저로서는, 글을 주신 분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 고민 속에 “대상”으로 선정한 유미향 선생님의 글은, 돌봄 전담사로 일하며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겪은 많은 경험과 느낌과 고민뿐 아니라 그에 관한 세세한 기록들,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과 고민들, 답을 찾고자 생각을 넓혀주는 노동 관련 책을 찾아 읽고 그 배움을 내 현장에 맞게 재해석하는 과정, 나의 노동현장을 넘어 타인의 노동과 다른 노동들에 대한 공부를 통해 “노동”과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넓고 깊게 이해해 나가는 탐구 과정, 자기 성장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질문들이 상세하게 드러나 있어 좋았습니다. 노동조합 활동의 보람과 어려움과 더불어 노조 활동 안팎의 갈등과 섭섭함에 대해서도 자신의 느낌과 말로 잘 드러내 주셨습니다.   17세에 교무실 “김양”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심부름 노동을 시작해, 28년간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로서 호칭과 직책과 노동 내용이 변화된 과정들에 대한 김서현 선생님의 글도 마음에 깊이 남습니다. 학교 안 사람들의 식사 및 그 준비와 마무리를 오롯이 도맡지만 자신의 식사 시간과 "밥값"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억울함에서 출발한 투쟁들, “봉사정신”으로 시작한 감정노동이지만 끊임없이 봉사가 강요되는 노동 현장에서 돌봄 노동자로서의 분노와 자각, "보조 교사"나 "교육실무원"이라는 모호한 호칭에서 비롯한 노동 범주의 애매함과 갖은 치다꺼리 노동들, "보조"라는 단어에 갇힌 차별과 모멸감, 성별로 인한 젠더 차별과 함께 남성 상급자의 성희롱까지, 모든 여성노동자들이 겪는 차별에 대한 인식으로 노동조합을 찾아 활동하고 이를 통해 얻은 자기 정체성 확립과 노동현장의 변화, 노동조합의 성과와 과제 등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들도 좋았습니다.   한편 장차 돌봄 노동자로서 생각과 삶을 확장하는 데에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대부분의 글에서 보이는 한계에 대해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혹 나의 관점과 느낌이 가족중심주의와 폐쇄적 모성담론, 국가중심주의, 성과주의 등에 갇히지 않았는지 더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머니로서는 당연한 듯 여겨지지만 “자식 돌보듯이......”라는 표현 속에는, 여성을 가정과 모성 안에 묶어두려는 자본과 국가가 만든 족쇄에 여성 스스로 제 발을 채우는 측면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태도는 책임감이지 소위 “모성”은 아니라는 점에 대해 다양한 여성주의 글과 책들이 있으니 꼭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나아가 노동현장 및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넘어, 자본과 국가와 여성노동의 관계에 대한 공부와 고민이 더 이어졌으면 합니다. 자본과 국가는 여성이 가정과 사회에서 하는 모든 노동을 “사랑”과 “봉사”라는 이름으로 무임금과 저임금으로 묶어두는 착취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해왔고, 최근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이 불평등과 착취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아 돌봄 노동의 가치와 중요성 및 “돌봄 사회로의 전환”이 말로만 언급되고 있는 최근 상황에서, 돌봄 노동에 대한 인식과 처우의 대전환과 투쟁을 위해서는 현장 노동자인 여러분들의 경험과 목소리가 어떤 정책전문가나 연구자들의 이론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글을 주신 모든 분들이 계속 글을 쓰시기를 간곡히 권합니다. 글쓰기는 나를 돌아보고 나와 우리의 현재를 확인하며 미래를 전망하는 데에 가장 쓸모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글 제출 여부와 상관없이 학교비정규직 현장 모든 노동자들의 수고와 분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심 사 평   이 상 임 / 시인     올해 작품 공모전의 주제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목소리를 내다!”이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당하는 차별, 서러움, 고용불안 등의 문제와 특히, 여성노동자들이 일을 하면서 가정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시를 통해서 생생한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시를 써낸 분들 모두 주제에 잘 부합된 내용으로 자신의 일자리에서 겪게 된 고충들을 섬세하고 진실하게 표현해 주었다. 그 섬세함과 진실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시의 화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가에 대해 쉽게 전이된다.   한 작품, 한 작품에 모두 애정이 간다.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의 삶의 쓰라림, 고통, 그럼에도 견뎌내야만 하는 자신의 인생 앞에서 조금씩 전진하며 그 희망의 숲을 찾아가는 여정이 시의 행간마다 조용하면서도 치열하게 스며있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 뼈가 부러져 깁스를 해도 부축해 주는 이 하나 없는 비정규직의 현장. 도와주는 이 하나 없이 일을 끝내고 햇빛 하나 없는 의자에 앉아 허공만 바라보는 비정규직의 삶. 더 이상 허망할 수 없다.(류양희) 새들도, 풀꽃들도 자리가 있고 하루를 시작하는 해도 자리가 있는데 공무직은 자리가 없다. 투명한 그림자로 이 세상에 남아 있을 뿐이다.(민현순)   듬성듬성 파뿌리 보일 때 만난 친구, 해고된 비정규직인 친구의 방패가 되어 도와 준 내 친구, 시들어버린 꽃처럼 살던 내게 햇빛이 되어준 친구, 그 친구는 다름 아닌 학교비정규직 노동조합.(김은주) 남들은 모두 즐겁게 듣는 ‘토요일은 밤이 좋아’를 토요일엔 무서워서 텔레비전을 끄고 우는 딸 앞에서 할 말을 잃은 엄마. 엄마는 토요일도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만 한다. 늦게 오는 엄마를 홀로 기다리는 토요일. 그 긴 시간이 딸은 무섭다.(김숙희)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을 쳐도 늘 제자리. 베이고 데이고 살이 뜯기는 상처와 고통들. 자존감을 곤두박질치게 만드는 처우와 사회의 시선. 멀고도 험한 그 길을 견디게 하는 힘은 오직 투쟁뿐.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생존의 이유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옮겨 앉는 일이다.(노현정) 떨고 있는 미래, 서러운 불안을 안고 우리 함께 길 위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신윤선) 젊음을 등에 업고 열심히 지지고 볶았더니 이제 몸 여기저기가 아파서 고치고 또 고치고 고쳐서 다시 쓰는 일만 남았다. 그래도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 지금보다 나은 환경이 기다리고 있겠지. 그 희망으로 또 지지고 볶는다.(김준미)   산다는 것은 때로 풀잎의 잠을 풋풋하게 흔들어 깨우는 일, 어제보다 더 푸른 꿈의 발자국이 봄처럼 찬란한 영광의 함성으로 비정규직의 벽이 무너질 때 우주가 쿵, 하고 흔들릴 것입니다.(김은희) 온 종일 음식을 조리한 열 손가락은 밤이면 아려오지만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어주는 이들의 행복을 노래하고 밤이면 꿈속에서 희망을 조리한다.(김영애)   이 사회에서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만큼 고통스러운 일인지 작품마다 내면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중에서 쉽지 않게 세 작품을 가려냈다.   산다는 것은 (김은희)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 문제를 항의하러 교육부 앞마당에 모여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봄날에 진달래가 부풀어 오른다.’던가, ‘꽃잎 같은 숨소리를 내며 꿈이 커가는 아이들처럼 우리들의 웃음도 또르르르 구른다,’고 빗댄 표현들이 이 사회의 불의에 저항하는 무거운 주제를 유연한 비유와 일상의 가벼움을 통해 서정적으로 잘 표현해 주었다.   언제나 내편 (김은주)   ‘시들어버린 꽃처럼 살던 내게 햇빛을 비춰 세상의 눈 밝혀준 늦게 만난 내 친구’는 ‘학교 비정규직 노동조합’이다. ‘학비노조’를 이렇듯 다정다감한 친구로 의인화하여 표현함으로써 ‘노조’를 삶 깊숙이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공무직의 자리 (민현순)   이 시를 읽으면 첫 행부터 마지막 행까지 쓸쓸함이 감돈다. 새들이 살아가는 허공에서, 풀꽃들이 살아가는 땅 위에서, 지혜와 가르침이 매일 피어나는 교육현장에서 화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자리를 살펴본다. 그렇게 꼼꼼하게 살피는 데는 이유가 있다. 화자가 처한 공무직의 자리를 확인하고 싶어서다. 그러나 끝내 그 자리는 없다. 세상을 바라보는 섬세함이 돋보이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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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30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박양미 / 눈물의 삭발식 사진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박양미 / 눈물의 삭발식 눈물의 삭발식 조리실무사 박양미 "학교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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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30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김수진 / 선인장 사진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김수진 / 선인장 선인장   방과후전담사 김수진   아주 작은 가시들이 모여 우리를 지킨다, 너와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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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30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최낙숙 / 노조 활동 10년 노조 활동 10년   조리실무사 최낙숙   1. 학교생활 - 노동자의 삶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저는 한 초등학교 급식실에 취직했습니다. 제대로 된 근로 계약서 조차 읽어 볼 겨를도 없이 앞치마부터 둘렀습니다. 알고 보니 제가 간 자리가 도저히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고 하며 반나절 만에 나간 빈자리였었습니다. 그렇게 고된 노동자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식들이 눈에 밟혀 지금의 저는 힘들지만 그저 묵묵히 버티는 것만이 길이라 생각했었던 어두운 날 들이였습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기억 중 하나는 1650인분의 카레를 만들던 날 입니다. 제대로 된 지시사항 없이 레시피 하나만으로 가마솥 2개에 카레를 끓였지만, 저에게 돌아온 건 카레가 묽으니 책임지라는 질책뿐 이였습니다. 처음 당해본 상황에 저는 죽을죄를 진 냥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그 당시 이 말에 부당하다는 대꾸조차 해주는 동료도 없어서, 작업복도 벗지 못한 채 학교 근처 마트로 달려가 울면서 사비로 카레 가루를 사서 다시 끓였습니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지금도 가족에겐 카레를 해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급식실에서 온갖 설움을 견디고 악바리같이 버텨온 세월동안 제게 남은 건 망가진 허리와 붓기때문에 쥐어지지 않는 손 그리고 산재판정뿐입니다. 이런 서럽고 힘든 기억은 나혼자 만이 겪고있는 악몽이 아닐것입니다. 식판 수백 개를 나르는 카트 바퀴가 고장이 나도 예산이 없다는 핑계로 사람의 힘으로 끌게 하고, 무거운 밥솥을 혼자서 옮기고 쭈그려 앉아 바닥을 수세미로 닦아서 허리가 상하고, 온 몸이 골병이 들어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것이 지금 우리 급식실 노동자의 삶 입니다. 이런 현실속에 학교비정규직 노동조합이라면서 지금의 김진주 지부장이 학교로 방문을 왔습니다.   2. 노동조합 - 새로운 변화   2011.7.9일은 부산학비노조가 창립을 한 날입니다. 이날 저에게 노동조합의 창립선언문 낭독을 부탁하셨고, 그 결과 이필선 부지부장님과 같이 낭독을 하게되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학비노조를 시작 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노동조합을 시작 하면서 노동법을 처음으로 알게되었습니다. 노동법을 배움으로써 학교에서 무지하게 일을 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몸으로 때워야 하고, 그것을 해내지 못하면 관두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의 임금은 대략 3월 월급은 83만원 2월 월급은 22만원 이였습니다. 학교에서는 임금이 방학때는 무노동 무임금 이라고 말했고 지금도 방학때 저희의 임금은 없습니다. 이런 악조건의 근로환경에 대해서 노동조합이 우리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임금도 인상했습니다. 누구하나 차별받는 일 없이 노동조합이 힘을 발휘해 주었습니다.   첫 시작은 노동조합단결투쟁으로써 명절수당 연 10만원을 쟁취한 것입니다. 이 명절수당을 쟁취하기 위해서 교육청 경비실 앞에 비닐로된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였습니다. 그러다 비가 오니 천막이 무너지기도 하고, 그 옆으로 쥐나 벌레가 기어지나가기도 했습니다. 그 고난을 참으며 명절수당이라는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교육청과 싸웠습니다. 그 결과 명절 때마다 식용유 1세트뿐 이였던 우리에게 처음으로 명절수당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이 투쟁을 시작으로 위험수당, 정기상여금, 급식비, 근속수당, 맞춤형 복지비 등 을 쟁취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개선해야 할 사항은 많습니다. 더 나은 우리의 근무환경을 위해서 지금도 여전히 교육청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급식실은 1명이 수행해야할 업무가 과도하게 많기 때문에 배치기준 하향 촉구 및 노동개선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타 지역과 비교해 볼 때 부산은 학교마다 급식실 환경 조건이 다릅니다. 어떤 학교는 식당과 교실배식 혼용으로 시행하고 있고, 어떤 학교는 식당이 여러군데로 나뉘어져 있고, 어떤 학교는 공동배식을 하는 등 다양한 형태인데도 불구하고 전보를 강행하여 현장에 혼란만 가져왔습니다. 그러므로 노동조합으로 단결투쟁하여 현재 보다 더 나은 환경개선을 시행해야합니다.   노동 조합을 만나고 노조 활동을 하게 되면서 노조 전임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처음 전임 당시 옆에서 컨트롤 해주시던 분이 계셨는데 그 뒤에 혼자서 학교 방문을 하게 되니 참 두려움도 많았고 떨리는 순간도 많았습니다. 노조 활동을 하면서 많은 조합원들을 만났고, 그분들을 보면서 예전에 힘들었던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울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우리 조합원들은 노동법을 잘 몰라서 학교가 시키면 다 해야만 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사무실에서 배운 것을 하나라도 현장조합원에게 더 많이 알려주고 싶어서 하루에 서너군데를 다니다 보니 무릎 한쪽이 고장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법이나 자료를 알려주면 현장 많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아픔도 잊고 현장 방문을 더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 결과 많은 조합원들이 노동법을 알게 되고 그 결과 학교와 맞설 수 있게 되면서 더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이런 가운데 18년도에 저에게 지부장을 하라고 말씀 해주셨을 때 저 같은 사람이 뭔 지부장이냐며, 지부장감도 아닌데라고 거부했었지만, 그래도 사무처 동지들과 조합원들을 믿고 지부장으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이 또 한번 앞섰습니다. 하지만 여러 노동조합을 방문하고 타 노동조합 간부님들을 만나보면서 오히려 제가 많은 힘을 받았습니다. 또한 지부장, 그리고 간부로서 해야 할 일을 습득하고 노력하며, 현장을 더 열심히 방문해서 조합원을 만나고 알려주는 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임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족은 조금 뒷전으로 미뤄졌던 것 같습니다. 지부장 시절에 시어머니와 모친을 만나지 못할 곳으로 보내드린 것이 조금 마음이 아려옵니다. 그래도 우리 4천 조합원들이 있기에 본분을 잊지 않고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지부장으로서 미약하지만 열심히 노력했었고 조합원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더 할 수 있습니다.   3. 후보출마 - 새로운 도전   50세에 노동조합을 만나고 57세에 지부장을 하게 되었고, 그 당시 민중당 부산 비례후보에 출마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산 전역 노동조합을 방문하면서 우리 학비를 알리고 비정규직을 알렸습니다. 그렇게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까지 여러 노동조합을 마주치게 되면서 나보다, 우리보다 더 열악한 환경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 노동조합을 설립해서 학비처럼 되고 싶다는 노동조합도 만났습니다. 당선은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민중당을 통해서 더 많은 노동조합과 당원들을 만나면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후보 활동을 통해 알게 된 현실은 부자들만이 사는 세상 같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부속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였습니다. 그 사실이 참 서글퍼서 더 열심히 바꿔나가야겠다는 힘을 얻기도 했습니다.   4. 현장결심 - 남은 도전   퇴직이 2년 남은 지금 저는 노동조합전임 당시 조합원들에게 노동법과 근로조건을 알려드렸으나 아직도 현장은 실현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배웠던 것을 직접 실천하기 위해 다시 현장으로 복귀하였습니다. 그 결과 학교 현장에서 행정실장과 직접 맞서기도 하였습니다. 사무처에서 알려주는 대로 실천 할 수 있으면 현장은 얼마든지 환경개선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많이 안타깝습니다. 단결투쟁하여 우리 학비노동조합이 하루 빨리 정규직화 되어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면 좋겠습니다.    
  • 학비노조
  • 911
  • 2021.11.30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임하정 / 비정규직에 이르기까지의 나의 삶 “비정규직에 이르기까지의 나의 삶”     영어회화전문강사 임하정   선생님, 처음에는 갑작스런 일이라 놀랐던 상황이 해를 넘어 계속되면서 이 시절을 더불어 새로운 삶의 방식이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제법 긴 단절의 시간을 지나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날들이 새삼 행복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전에 우리가 나누었던 꽤 진지한 이야기를 넘어 저의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제 쉰 중반의 나이에 이른 저의 지나온 시절을 좀 편안하게 볼 수 있는 때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유년 시절, 초. 중학 시절 우리 동네의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무슨 이유인지 술 없이 지내는 날이 없었고, 저와 동생들은 막걸리를 사러 주전자를 들고 외상술을 사러 매일 동네 점방을 다녔습니다. “외상이요.” 하는 말이 부끄럽고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즈음이면, 연달아 있는 동생들이 그 일을 이어서 담당하곤 했지요. 저는 아래로 네 명의 동생들이 있었으니 참, 다행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막내 동생을 낳으시기 하루 전날까지 왕복 4시간이 넘는 먼 길을 걸어서 겨우 빌린 남의 밭에서 우리가 먹을 감자와 채소류를 재배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가장의 할 일을 방관하셨고 한편 몸도 아프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남의 집 일을 하거나, 공사장에 가시거나 무슨 일이든 하셔서 겨우 우리를 먹여 살리셨습니다. TV도 없고 동네를 벗어나 본 적이 없어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줄 알았습니다. 중학교에 가서야 친구가 사는 집에 가보니 아버지는 직장에 다니시고, 어머니는 가사를 돌보시며 집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러온 우리들에게 과일과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셨는데, 명절이 아닌 평일날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게 신기했습니다. 그러니 중학교를 다닐 형편도 어려워서 지원을 받아 다녔습니다. 이웃의 언니들도 중학교를 졸업하면 다른 도시로 일하러 가거나 공장에 취직하러 가곤 했으니 동네에서 가장 형편이 어려운 우리집에서 제가 고등학교를 갈 때가 되니 이구동성으로 말렸습니다. 당시에는 마산 수출 자유 공단이 있어 그곳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한다는 말이 있어 지원하려고 했으나, 체격 조건이 맞지 않아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학교에 다니고 싶어하니 인근에 있는 방직공장에 취직을 하고 야간 고등학교를 갈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그 겨울부터 공장에 갔는데, 아침 7시 30분까지 출근하여 저녁 7시 30분 퇴근하였습니다. 제게 주어진 일은, 실을 감는 것을 지켜보며 끊어진 부분을 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점심시간 때 외에는 화장실도 한번 가지 않고 제 자리에 서서 지켜보며 실을 이어주는 일을 했는데, 퇴근 때 다리를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며칠을 다리가 아파서 힘들어 했는데 옆에 일하던 언니가 약간의 요령을 알려주어 근무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월급을 받았는데 약 구만원 정도였습니다. 그때가 84년 2월이었고, 어머니는 처음으로 월급이라는 돈을 구경하셨습니다. 그 돈으로 쌀을 사고 그리고 제 입학 등록금을 대었습니다. 낮에도 컴컴한 공장에서 일을 하고 5시에 학교를 가는 길은 너무도 자유로운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가면 졸음이 쏟아지곤 했습니다. 입학 첫날 선생님이 임시 반장으로 임명해 주셨는데, 나중에 선거를 통해 반장이 되었습니다. 저는 영어를 좋아하여 항상 영어시간이 되면 아무리 졸려도 집중했고, 영어 선생님과 눈을 맞추며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제가 다니던 공장은 일주일 단위로 주야간 교대를 했기에 어떤 때는 10시에 수업을 마치고 다시 공장으로 가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잠이 많던 제게 그 일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식품회사에 일당직으로 다니곤 했습니다. 그러나 제 사정을 잘 아시던 선생님께서 좀 나은 직장을 알선해 주셔서 실험실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수질오염과 대기 오염을 측정하는 회사였는데, 저는 연구원들의 실험을 보조하고 실험기구를 세척하고 샘플 채취를 보조하는 등의 업무와 여러 심부름을 했습니다. 그곳에 근무하는 동안 연구원 선생님은 제게 앞으로 환경분야가 중요하다며 진로의 방향을 예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급여가 열악하여 오래 있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다른 곳을 주선해 주셨는데 지역에서 가장 큰 회사였습니다. 제 일은 총무부의 업무보조, 도서실 관리와 청소 등이었습니다. 직원들이 많은 회사였기에 할 일도 무척 많았습니다. 인사과 업무도 보조하므로 여러 직원들의 인사관리 카드와 급여 정리하는 일을 도왔는데, 많은 직원분들이 대학을 나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 주변에 대학은 나온 사람이라고는 학교 선생님들이 전부였는데, 그분들이 받는 급여는 당시로서는 굉장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도 대학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회사에는 독일에서 기술자들이 오곤 했는데, 총무부에서 접대를 하므로 자주 커피를 들고 다니며 인사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는 정도의 인사를 영어로 하며 몇 마디를 주고받곤 했는데, 상사들은 칭찬을 해 주시며 “열심히 공부해서 영어 박사님이 되라.”며 진지하게 말씀해 주신 차장님이 계셨습니다. 또 공장장님께서는 매월 월급날 불러서 “노트 값 하라” 하시며 용돈을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분들은 제 삶에 “희망과 꿈의 씨앗”을 주신 분들입니다. 겨우 야간고등학교 다니던 조그만 아이에게 너무나 큰 비전이라 할 수 있는 큰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들은 오랫동안 제 가슴에 살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정식직원으로 채용해 준다고 했지만 저는 거절하고 진학을 하겠다며 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대입학력고사를 치렀고, 영문학과에 지원했으나 낙방하였습니다. 재수를 할 형편이 아니어서 아는 선생님의 주선으로 과학실무원으로 취직하여 타지방으로 출퇴근을 했습니다. 급여는 교통비와 용돈정도였으나 대안이 없어 1년을 다녔습니다. 다시 1년은 공무원 시험을 볼까 하는 마음으로 독서실을 다니곤 했으나,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시 진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전문대학에 지원하여 합격통지를 받았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지만 저는 너무 기뻐서 며칠을 아침 일찍부터 걸어서 다녔습니다. 대학 등록금은 동생이 산업체 고등학교 다니면서 번 돈으로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 시절 정말 공부를 잘하고 재능이 많았던 동생은 인문계 다니려고 모든 것을 다했는데 가정 형편 앞에서 새로운 결단을 내려, 집을 떠나 노동의 현장으로 갔던 것입니다. 제가 방황할 때 동생은 그 힘든 수출공단의 현장에서 제가 견디지 못한 그 고된 현장을 지키며 주경야독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들게 번 돈으로 제 등록금을 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학교 방송국에서 일하며 장학금으로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취직후 동생의 한 학기 등록금을 내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날의 감회는 오랫동안 가슴에 있었습니다. 동생과 제가 전문대학을 다니는 동안 엄마는 남의 집 일을 계속하시면서 저희를 뒷바라지해주셨고, 그 아래 동생들도 공부를 잘하여 힘들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대학 진학을 했습니다. 그토록 어려운 시절을 잘 견뎌내고 살아온 동생들에게 전우애를 느낍니다. 우리는 가난과의 긴 싸움을 하나씩 헤쳐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 후 결혼을 하여 첫 아이가 3살 될 무렵, 제법 부유해 보이던 시댁의 사업이 점점 부진해 보이며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시기로 보였습니다. 나는 남편에게 내 공부에 투자하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남편은 동의해 주었습니다. 드디어 나는 영어영문학과 편입 시험을 치르고 허가를 받았습니다. 33살이었는데, 교수님은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이”라고 말씀해 주시며 공부할 거리를 많이 주셨습니다. 아침이면 도시락과 함께 아이를 내복 바람으로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는 학교로 갔습니다. 어린이집이 마치는 시각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퇴근하곤 했습니다. 어린이집 선생님들도 제 형편을 아시고 응원과 도움을 주셨기에 난생 처음 영어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영어를 좋아했지만 공부를 해 본적은 거의 없었으니 실력 있는 학생들 틈에서 죽기로 공부해야만 했습니다. 아이를 재우고 쪽지시험 준비를 하고, 과제를 하느라 새벽에 겨우 몇 시간 자기 일쑤였고, 시험 때면 두피에 뾰루지가 나서 베개를 벨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괜한 짓이 아닐까, 미쳤지, 하는 자괴감이 들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방학이 되면 그 모든 후회감이 사라지고 다시 후회하고 하면서 졸업을 했습니다.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는 것은 제게 마치 날개를 단 것처럼, 비상 할 수 있는 것처럼 좋았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졸업을 하고, 시골 초등학교 방과후 영어 강사로 취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수익자 개인 부담이 아니라 학교가 정한 강의료가 너무 작았고 방학이면 아예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학때 일을 그만두고 서울 한 대학교의 테솔 수업을 수강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친정 어머니께 부탁 드리고 한달 동안 서울에서 생활하게 된 것입니다. 남편은 그동안 여러 일을 전전하다가 영사기사로 취직을 해서 다른 지방에 있었습니다. 남편과 저는 여러 공부에 시간과 돈을 투자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울에서 한달의 시간이었지만 또 다른 배움을 경험했고 교수법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학원에 취직을 했는데 둘째 아이를 가진 후 입덧이 심하여 일을 접었습니다. 얼마 뒤 출산 후, 한 선배로부터 교육대학원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저도 지원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아기를 키우면서 공부하면 될 것 같아 지원을 하기로 했습니다. 둘째 아이가 백일 되던 날 시험을 보고 왔는데 어렵게 합격을 소식을 받았습니다. 교육대학원은 토요일 하루 종일 수업이 있었는데, 아기가 오직 엄마 젖만을 먹어서 수유시간을 지키지 못해 서로 힘들었습니다. 종일 굶었다가 엄마만 기다리는 아기를 만나면 자책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교육심리학 수업때는 젖먹이를 떼어 놓고 공부를 한다고 다니는 제 자신이 너무 이기적인 결단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많이 울었습니다. 3학기부터는 논문을 쓰면서 어머니께서 살림을 대신 돌봐주셨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의 화행 분석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면서 저로서는 가장 많은 논문을 읽었고 시력이 저하되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 후 논문 발표와 함께 졸업을 했고, 남편은 젊은 나이에 퇴직을 당했습니다. 그곳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와 남편의 이해와 도움 없이는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살아오면서 내가 이룬 성취라고 여겼던 것들은 사실 가까운 가족의 도움과 협력이 없었더라면 결코 이룰 수 없었다는 것을 실은 쉰 살이 되어서야 알았습니다. 그러니 41살이 되어 학교에 취직을 했을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나는 삶의 파고를 잘 헤쳐왔고 노력을 해서 이른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퇴직을 당한 남편은 일자리를 알아보기위해 그동안 배웠던 자동차 정비나, 영사기사 일을 알아보았으나 입사할 수 있는 곳은 없었고, 아는 지인의 회사에 영업사원으로 근무하다가 결국 퇴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생활비가 절약 될것으로 여겨졌던 시골로 이사를 왔습니다. 제가 학교 근무를 시작하고 2년이 지난 후 였습니다. 그동안 저는 영어체험실 내국인 강사로 1년 단위 고용되었습니다. 첫해에는 그저 학교에서 일한다는것이 좋아서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다음 해 지자체로부터의 예산이 줄어서 제 자리는 사라졌고,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 덕분에 기간제 교사로 채용되어 1년을 지냈습니다. 그 후 이번에는 예산이 더욱 줄어서 원어민 두 분이 고국으로 가시고 저와 다른 한분이 체험실에 남겨졌습니다. 해마다 바뀌는 예산에 의해 겨울 방학 때부터 불안한 하루 하루를 보내곤 했습니다. 그러다 영어회화전문강사 자리가 나서 지원을 했고 그때로부터 매4년 마다 퇴사와 입사를 반복하며 시험과 계약을 치르며 저는 이곳에 근무한지 만 12년이 지났습니다. 많은 선생님들과 학년을 같이 보내며 학생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업무를 공유했습니다. 일을 통해서 존중해 주시고 인정해 주시며 동료애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선생님들은 저를 비정규직 강사라기보다 영어 전문 선생님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사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저의 급여나 고용상황은 전혀 나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기다리면 뭔가 나아질 것이라 기대했는데,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없는 사람처럼 여겨진다는 것을 노동조합에 가입하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하면서 사회의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지 알게 된 것입니다. 제 존재를 중심으로 사방을 살펴보고 좌우를 보게 됨으로 사회 구조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마치 갑자기 한국 사회에 내던져진 이방인처럼 저는 비로소 사회 현안에 귀 기울이게 되었고, 현실의 문제를 내 삶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최선의 노력으로 살아온 것처럼, 어느 누구도 잘못 살아온 결과로 비정규직의 굴레를 쓰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다 말할 수 없는 긴 사연들과 아픔들이 있는데, 과연 우리가 그 아픔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요? 그런 여유를 우리가 가지고 있을까요? 다른 분들은 또 다른 시련과 고통을 겪어왔고, 어떤 분들은 그것을 통과하여 정규직이란 타이틀 속에 포함되어 있지만 과연 그게 우리를 안전하고 행복하게 해 주고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다른 종류의 시험들을 지나왔습니다. 직장을 갖기 위한 채용 시험도 물론이지만, 살아가면서 선택의 기로에서 얼마나 많은 도전을 통과했는지 모릅니다. 삶의 문제에서는 정답이 없기에 우리는 나중에 삶에서 그 해답을 발견합니다. 때문에 선생님, 저를 그냥 제 존재로 인정해 주시고 존중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정규직 교사와 같은 종류의 시험을 볼 여력이 없고,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선생님”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과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영어 한 과목을 12년간 가르쳐온 저에게 전문성을 논하는 것은 부당하고 도를 넘은 주장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동안 수업을 통해서 늘 자신의 수업을 관찰하고 반성하며 더 나은 수업을 위해 늘 열어 두고 공부해 왔습니다. 학생들과 잘 소통하기 위해 여러 공부를 해 왔고 선생님과도 이런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생각과 의견이 달라도 언제나 보내주신 지지와 응원에 감사드리며, 다음에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요청해도 될까요? 마당에 피어난 분홍빛 과꽃처럼 건강한 여름을 보내시길 빕니다.    
  • 학비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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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30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이준길 / 正規직과 批正규직 正規직과 批正규직 운동부지도자 이준길   Why! 정규직이 되어야 하는가?   ◎ 지도자에서 교육자로! 비정규직 학교지도자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우리나라 체육교육과 엘리트 교육현장을 먼저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엘리트란 학교 운동부를 이야기한다. 중학교 시절 체육 시간에 體育이라는 한자를 배웠던 기억이 난다. 體育은 한자 그대로 신체를 기르는 과목이다. 영어로는 physical education으로 이 또한 신체를 교육하는 것이다. 교육은 인간의 올바르고 행복한 삶이라는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기본적으로 최소한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엘리트 학생선수 육성은 신체를 교육하는 것으로 엘리트 ‘훈련’, ‘지도자’와 같은 단어를 ‘교육’, ‘교육자’라는 선택으로 바꾸어 이야기하고자 한다. 엘리트 선수 육성을 교육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전문적인 신체기능을 교육한다. 학교현장에서 엘리트 선수에게도 신체기능의 교육이 이루어진다. 이는 학교 체육과는 다르게 전문적인 기술 및 신체기능을 교육받음으로써 학교를 대표하고 나아가 지역과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로 육성되어 간다. 체육은 ‘신체활동’을 통해 행동 및 마음을 조절하는 능력을 기른다. 이를 바탕으로 건강한 신체와 정신은 사회구성원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역량이며 여기에 필요한 것이 이론 및 신체에 대한 교육이다. 엘리트 학생선수 교육은 특정 스포츠 종목의 전문성을 기르기 위해 세심하며 구체적으로 뚜렷한 교육이 강조된다. 이 또한 체육수업과 같은 맥락으로써 필요한 자질과 역량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   두 번째, 엘리트 선수교육은 전문적인 기술 및 근력(힘)의 움직임이다. 엘리트 학생선수 교육은 크게 신체의 교육과 인성교육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신체 교육은 전문 기술을 교육함과 동시에 특정 스포츠 종목에 적합한 근육의 성장 및 사용을 교육한다. 이와 같은 신체 사용은 이론으로 학습할 수 있지만 교육자가 직접 경험한 것과 경험하지 않은 것의 차이는 확연히 나타난다. 기술과 근력(힘)의 사용은 상황에 따라 전략적으로 다양한 변화가 필요하다. 엘리트 선수 교육과정에서 함께 호흡을 맞추며 학생선수의 심리 및 정서적인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교류 또한 전문적인 선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세 번째, 품격을 갖추기 위한 행동 조절능력을 교육한다. 최근 도쿄올림픽에서 볼 수 있었듯이 최고의 성적만을 위해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선수들이 경기에 임하는 과정과 경기가 끝난 이후의 태도에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 것은 올바른 품격 즉, 인성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엘리트 학생선수 교육과정에서 인성 및 예절교육이 함께 이루어지고 있는 점을 나의 선수 시절 “훌륭한 선수보다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학생선수가 신체적 정신적 한계에 도달함으로써 나타나는 심신의 변화를 조절하지 못해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도 볼 수 있다. 이처럼 학생선수의 문제 행동을 예방하고 교정하는 것이 엘리트 교육이며 청소년들의 긍정적인 에너지 발산을 위해 스포츠 참여를 권장하는 것이 여기에 있다. 그뿐만 아니라 스포츠 경기에는 규칙과 스포츠 정신이 존재하며 스포츠 정신이 바로 인성 그 자체이다. 규칙을 준수하는 연습을 통해 사회구성원으로서 도덕적인 규범을 갖추게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 나타나는 엘리트 선수의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더욱더 인성교육의 접근이 필요하다. 학생선수에게 운동기능을 비롯해 인성교육과 같이 다양하고 전문성 깊은 교육이 필요하다. 이는 학생선수를 교육하는 교육자로 역량이 강화되고 발휘되어야 하며 ‘교육자’라는 인식을 통해 조금 더 성숙하고 연구하는 자세의 교육자로 나아가야 한다.   ◎ 학교 체육과 엘리트 스포츠 살펴보기   첫 번째, 체육과 엘리트 스포츠의 이질성 학교 체육과 엘리트 스포츠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체육 교사는 임용시험을 통해 교사가 되고 학생선수 교육자는 전문스포츠지도자 자격증 취득을 해야 한다. 이질성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학교 체육은 정규교과 과정에서 출발하였고 엘리트 스포츠는 교육과정과 별개의 부서로 운영되며 과거부터 현재까지 소년체전과 전국체전이 중심이 되었다. 엘리트 스포츠는 학교를 빛내거나 학생선수들의 성과달성과 인기스포츠 위주로 운영이 되었다. 경기결과에 따라 엘리트 스포츠 부서의 존폐와 함께 엘리트 교육자의 불안정한 고용 형태를 볼 수 있다. 또 다른 이질성은 경기결과에 따른 보상이다. 엘리트 학생선수 감독(교사)은 진급에 관련된 점수가 부여되고 엘리트 학생선수 교육자는 소년체전과 전국체전을 통해 포상금이 지급된다. 반대로 경기 성과가 부정적일 경우 감독(교사)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지만, 학생선수 교육자는 직장을 잃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결국, 직장을 유지하기 위해 과도한 훈련과 처벌이 발생하는 ‘승리 지상주의’의 문제점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관심 밖의 체육과 엘리트 선수 2019년 OECD 주요국의 초등학교 의무교육과정 수업시간 비중 지표에 따르면 체육 및 건강 수업(시간)이 핀란드(9), 일본(10), 독일(11), 프랑스(13)으로 한국은 7시간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수치만 보아도 국내 체육 시간 및 건강에 대한 수업은 현저히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인간 지식의 교육과 동시에 평행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바로 신체 교육과 건강이다. 우리의 몸은 모두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와 같은 근육을 효과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건강한 정신과 신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체육 및 스포츠 수업과 같은 신체활동을 장려하는 교육 방향이 제시되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 경제가 빠른 성장을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한 것은 건강한 신체와 정신보다 업무수행 능력이다.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한 체육과 스포츠 참여는 경제 및 시간의 여유를 확보한 다음 여가로서의 참여가 이루어지게 된다. 결국, 높은 연봉의 대기업 또는 공무원이 되는데 필요한 과목이 교육현장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체육을 뺀 공부는 직장의 선택에 영향을 주고, 좋은 직장은 삶의 질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 학생선수 교육자로 살아가기. 학생선수 교육자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 교육자의 권리를 획득하고 스포츠 선진국으로 가는 초석을 다지기 위함이다. 현장에서 학생선수들과 함께 호흡하고 실질적인 실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현재 체육 중학교 복싱부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새벽 6시에 훈련을 시작으로 오후 6시까지 전공 교육시간을 통해 학생선수를 교육하고 있다. 기숙사를 생활하는 점에서 24시간 선수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체육고등학교 출신으로 학교생활을 잘 알고 있으며, 불편함 없이 잘 지내고 있다. 정규 수업시간을 제외하고 항상 함께 학생선수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크고 작은 보람을 느끼는 것은 내 삶에 있어 또 다른 즐거움이다. 운동선수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지도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나 또한 지도자가 되는 상상을 해봤으며 좋은 기회가 찾아와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학생들을 지도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는 이면에 현실적인 걱정은 최저시급에 근접하는 급여다. 생활비를 제외하고 적금을 넣어 결혼자금을 마련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어떻게든 아끼고 아껴서 생활하고 퇴근 후 야간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싶지만, 새벽 훈련이 있어 그렇게 하지도 못한다. 경제적인 걱정이 앞서 학생선수 교육에 전념할 수 없는 현실은 안정적인 급여측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학생선수를 교육하는 것도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지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급여를 충족하기 위해 또 다른 직업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은 학생선수를 교육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허비하게 된다. 경제적인 안정보다 지도자로서 학생선수를 교육하고 육성하는 경험을 쌓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겠지만 현실은 경제적인 걱정을 안고 살아간다. 나는 최근 학생선수를 대상으로 ‘진로탐색 과정’의 연구를 진행했다. 결과에는 담지 않았지만 대부분 학생선수는 비정규직 지도자의 직업을 선택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정규직을 반대하는 공무원의 이야기는 우리가 정규직이 되면 후배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라고 한다. 요즘 학생선수들도 직업에 대해 빠르게 파악하고 흐름을 알아가고 있으며, 조금 더 안정적인 삶을 원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학생선수들은 공무원, 직업군인, 개인 사업을 생각하지 비정규직의 학생선수 교육자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점에서 간단히 진행되는 부분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권리 보장을 위한 정책을 바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는 특정 집단 및 조직에서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닌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진행되어야 한다. 체육 정책으로 다양한 비정규직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이를 정규직으로 전환해 가는 새로운 일자리 창출의 흐름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경제적 안정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 권리를 획득하는 것은 직업에 대한 자긍심, 애사심을 바탕으로 학생선수의 권리 보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학생선수 교육자의 안정적인 면은 학생선수에게 직⋅간접적으로 신뢰와 안정감을 공유할 수 있다.   ◎ 승리 지상주의와 비정규직의 관계. 학생선수가 경험하는 교육의 의미는 모두 똑같이 전달될 수는 없지만, 학생선수에게 열정을 쏟은 만큼 빠르게 경기결과로 나타난다. 깊게 자리 잡은 승리 지상주의는 선수를 교육하는데 단 하나의 목표에만 몰입하게 만들었다. 특히 승리에 포함된 포상은 선수 및 교육자에게 적극적인 동기 부여는 되겠지만, 일회용 선수 및 지도자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다시 말해 포상금이라는 맹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무차별적인 훈련은 부상, 은퇴, 폭력 등과 같은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상급학교 진학에 관여하는 과정에서 금전적인 보상을 요구하는 등 승리를 통한 포상금과 같은 대체보상을 추구하는 것이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비정규직을 다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종합해 보면 지도자에서 교육자라는 인식변화와 명칭변경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는 전문적인 신체기능, 기술, 힘의 사용을 교육하고 있으며, 인성, 예절, 품격을 갖추기 위한 교육이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자라는 명칭변경을 통해 학생선수를 교육하는 교육자의 직업 가치를 높임으로써 교육의 질 또한 높아질 것으로 생각한다. 현실적인 면에서 체육과 엘리트 스포츠의 이질성은 엘리트 스포츠가 좀 더 특별하고 특수한 부분임을 뒷받침해 줄 것이며, 체육 및 엘리트 선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변화를 위한 노력 또한 필요하다. 학생선수 교육자의 정규직 전환을 통해 경제적인 문제해결과 동시에 승리 지상주의에서 벗어난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 학생선수 교육자 환경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나무의 뿌리는 ‘교육’, 나무의 몸통은 ‘정규직이라는 직업의 형태’이며, 학생선수들의 경기결과는 곧게 뻗은 가지와 과실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질 높은 교육과 좋은 결과를 끌어내는 과정에 교육자의 안정적인 삶이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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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30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방애경 / 유치원교육실무원의 하루일과와 문제점 유치원교육실무원의 하루일과와 문제점   유치원교육실무사 방애경   학교비정규직 중 인천공립유치원에서 5시간 근무하는 교육실무원이라는 직종입니다. 학교내에서 제일 어린 만3,4,5세 원아들을 교원인 정교사들이 가르치는 일을 하시고, 우리 직종은 보조교사로서 교육지원과 급식차를 가지고 와서 배식하고 치우는 급식종사자 역할도 하고, 환겸미화원처럼 유치원 내 청소를 도맡아서 하고,원아 안전관리, 유치원 행사 지원 하기, 현장체험학습 교육 지원하기, 귀가지도 지원 및 생활지도 지원업무를 담당하는 직종으로 유치원 교육 과정이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게 지원하는 필수 인력입니다. 단순히 보조정도만 한다면 모르지만 하나에서 백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을 하는 유치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슈퍼우먼 만능 직종입니다. 이렇게만 설명을 하면 우리 직종의 업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감이 잘 오지 않으실 거 같아서 하루의 일과를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출근을 하자마자 유치원 현관에는 오전 간식이 택배처럼 와 있습니다. 들고 들어와서 간식 준비를 하려하면 교실에 먼저 와 있던 원아가 기다렸다는듯이 선생님 응가할래요 하면서 옵니다. 요즘 원아들은 뒷처리를 스스로 하는 원아가 별로 없기에 교육실무원이 도맡아서 합니다. 간식준비를 하는 중간에 원아들이 등교했다고 벨을 누르기 시작하면 원아 맞이를 해가면서 간식준비를 합니다. 간식을 각반에 넣어주고 원아들이 손을 닦으러 나오면 안전거리 유지하게 하고 깨끗이 닦게하여 교실로 들여 보냅니다. 간식을 나누어 주고, 먹다 흘리는 거 닦아주고, 다 먹으면 책상 위 아래 깨끗이 닦아주고, 간식그릇 정리하여서 가지고 나와서 깨끗이 설겆이해서 소독기에 정리해 놓기. 원아 가방에 있는 알림장 꺼내서 확인하고 정리하여 가방에 넣어주기, 바깥놀이 하는 날은 유치원 놀이터 청소하기, 원아 데리고 나갈 때 보조하기, 강당에서 체육활동하면 보조 지원하기, 독서실 가면 같이가서 보조하기, 거의 매일 교재 교구 제작하기, 그리고 제일 힘든일이 책이나 교재교구 청소용품 미술재료 등등 택배가 수도없이 오면 교육실무원이 다 정리하는 일처럼 되어 버려서 택배 정리정돈부터 박스 폐휴지장에 갖다 버리기까지 하고 나면 그야말로 노동의 한계가 옵니다. 물 한잔 마실 여유 조차 없고, 생리적인 현상도 참아가며 학습지원을 위해 교실에 들어가서 유아교육을 위해 헌신을 하고 있습니다.   점심시간에는 급식소 복도에 있는 급식차를 끌고 와서 각반 교실 배식을 합니다. 급식차 정리를 하고, 급식판에 밥 국 반찬을 담아서 원아에게 가져다 주고, 교육실무원도 함께 급식을 먹습니다. 먹다가 반찬 모자란 게 있으면, 급식소에 가지러도 갔다와야 하고, 물 흘리고, 음식물 흘리면 닦아 주러 가야 하고, 그 와중에 응가 마렵다 하면 교육실무원이 거의 다 닦고, 처리를 해 줍니다. 급식을 다 먹으면 음식물을 국그릇에 담게하고 갖다 버리는 것은 교육실무원이 합니다. 급식 먹고 나면 급식소에서 가지고 온 모든 그릇에 담긴 음식물을 바구니에 담고, 급식판과 그릇들을 설거지 하기 편하게 정리를 해서 급식소에 갖다 주어야 합니다. 점심 먹고 난 교실은 책상을 걸레로 닦고, 바닥은 물티슈로 음식물 흘린 거 닦아주고, 마대질로 깨끗이 청소를 합니다. 그리고 양치하는 원아 잘 닦을 수 있게 도와주고, 칫솔을 닦아서 칫솔소독기에 넣어주어야 하고, 각 반에 있는 화장실 청소도 하고나야 점심시간이 끝납니다. 육아를 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유아들과 같이 밥을 먹는다는 건 가장 열악한 근무환경이라 위장병을 달고 살며, 밥을 먹자마자 청소를 하니 항상 빨리빨리에 길들여진 로봇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점심시간이 후딱 지나고 하원시간이 되면 가방 정리 잘 되어 있는지 살펴야하고, 겉옷을 입히고, 가방 메주고, 실내화에서 실외화로 신는 거 도와주고, 하원을 도우러 교문에 나가서 하원을 시킵니다. 원아가 하원을 하고나면 교육실무원은 각반 청소, 복도 청소, 특별실 청소를 하고, 쓰레기 종량제와 재활용을 버리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젖어있고 퇴근 시간은 이미 지나 있습니다. 정교사의 업무까지 일방적으로 강요당하는 등 명확한 고유업무 없이 유치원의 모든일을 지원하게 되어 업무 강도가 상당하고, 이 많은 일들을 매일같이 반복해서 5시간안에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바쁘고 힘들지만 아이들과 생활하고 해맑은 아이들의 미소를 보며 미래의 교육에 일조한다는 자부심에 작은 월급이지만 만족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2014년부터 교육감소속으로 바뀌면서 수당신설등으로 더욱 좋아졌다는 말로 우리를 속이고, 계약서를 슬쩍 변경하였고, 제대로 읽어 볼 계약서도 못본 채 반강제적으로 도장을 받아갔고, 그동안 비례없이 받던 각종수당을 8분의 5로 받게 되는 차별을 당하며 비정규직중의 비정규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일을 겪을 때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노동조합에 우리직종이 있다는 걸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교육감 소속으로 무기계약전환 이후 근로기준법상 휴게시간을 준수해야 한다는 이유로 5시간 계약서를 5시간 30분 계약서로 변경 할 것을 인천시교육청이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회계직소속일때 단협안에 있는 학교회계직소속 8시간 근무자들에게 학교특성상(특약) 점심시간을 근무 시간으로 인정을 해 주어서 8시간안에 30분 휴게시간 적용한 것을 우리직종에게도 적용 해 주는 것으로 해석한 행정실에서 5시간안에 30분 휴게시간을 넣은 계약서를 써 준 것입니다. 2016년 4월6일 노동조합 집행부와 교육실무원 저를 포함한 3명의 선생님들이 용기를 내어서 직종교섭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참석하게 되었고, 내 근로계약서가 유리하면 변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인천시교육청의 답변을 듣게 됩니다. 너무나 기쁜 소식도 잠시 소속학교의 교장, 교감, 중간관리자의 협박에 못 이긴 교육실무원 선생님들의 70퍼센트가 계약서를 변경하였고, 유치원 업무 특성상 휴게시간을 제대로 보장 받지도 못하고, 유치원내에 휴게할만한 공간도 없기에 계약서에 있는 휴게시간 30분은 서류상 존재 할 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유치원에 30분 더 봉사하는 꼴이 되어 버린 상황입니다. 너무나 억울한 상황은 5시간 근로계약서에서 5시간30분 근로계약서를 협박으로 바꾸게 하려는 부분이었습니다. 직종교섭때 직종교섭으로 나섰던 저에게도 중간관리자의 협박이 있었습니다. 2012년에 입사하여서 5시간계약서 안에 휴게시간이 있었어도 유치원 원아들의 교육시간에만 근로하는 직종 특성상 쉬는 시간을 갖기 어려워서 정교사와의 친분때문이라는 나의 합리화를 시켜서 2016년 4월까지는 휴게시간을 갖지 않는 근무환경이었고, 학교내 관리자들도 누구하나 근로기준법상 위법이라 알려주는이도 없었는데, 근로계약서를 바꾸게 하려는 협박은 중간관리자들과 정교사들의 따돌림과 그동안 좋았던 사이가 갑과 을의 관계로 바꾸게 되는 직장내 갑질로 이어지더군요. 그래도 굴하지 않고 그동안 쉬지 못했어도 이제부터는 휴게시간을 갖겠다고 하니 유치원 중간관리자 얼굴이 굳어지더니 윗선인 교장과 교감선생님에게 전해지고 교실로 부르더니 교감선생님께서 너희들 계약서를 바꾸지도 않고 휴게시간까지 쉬면 앞으로 학교 다니는 동안 불합리한것들이 많이 생길거라고 되놓고 협박을 하더군요. 그순간 알았습니다 그동안 원아의 안전과 정교사의 안위를 위해 배려했던 마음이 아무 쓸데없는 내 처우를 하락시키는 일이었음을요. 그래서 답을 했습니다. 저는 내 근로계약서에 위배되는 일을 한 적은 없고 오히려 노동시간에 봉사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불합리해서 그만 두더라도 그렇게 아까운 직종이 아닙니다. 라고요. 몇 년이 지나고 보니 협박하던 관리자들은 자연스럽게 전보들 가시고, 협박받던 저는 그대로 내직종을 유지하고 있네요. 보조라는 이름으로 인권유린에 노동력 착취까지 당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인천시교육청의 인사권 경영권이라 하면서 2016년도부터는 유치원교육실무원에게 재배치직종이라면서 각반에 한명 있던 울직종을 6개반에서 한명 빼서 신설된 유치원으로 보내더니 매년마다 2017년엔 5개학급에서 한명빼서 신설로재배치 보내고, 2018년에 4개반에서 한명빼고, 2019년엔 3개반에서 한명빼고, 2020년엔 다시6개학급에서 또 한명을 빼고, 2021년도엔 5개학급에서 또 한명을 뺏고, 단설은 매년마다 교육실무원 인원을 감축하고 있습니다. 공립유치원이 감축되는 것도 아니고, 사립유치원 사태이후 교육부차원의 공립유치원 대폭 증설 계획이고, 공립유치원 증가는 사회적으로 볼 때 바람직한 방향임에도 교육청은 이러한 방향을 예측하거나 합리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갑자기 학급수가 늘게 되자 허겁지겁 졸속 대응을 하고 있습니다. 울직종은 몇 년전부터 유치원 상황에 따른 배치기준 마련을 요구 했으나, 암묵적으로 묵살하고, 유치원내 교육실무원만 감축시켜서 그 빠진자리의 노동력 증가를 오롯이 교육실무원이 감당하게 하는 살인적인 노동강도와 원아 미달도 아닌곳에서 인원 감축을 해서 다른직종보다 처우하락으로 차별 당하고 있고, 신설된 유치원엔 신규채용도 없이 단협위반인 대체인력 기간제실무원만 채용하고, 근로장학생 청소용역투입으로 존재감 위기 조성에 고용불안과 존폐의 위기에 내 몰리게 되었습니다. 타지역에도 울직종이 있지만 다른형태의 직종을 만들어서 인천만 있는 직종(서울,부산은 울 직종이 있고 다른지역은 직종의 명칭이 다를 뿐)이라 하며 일몰사업으로 내몰고, 유치원의 원활한 운영과 타지역 보다 편안한 정규직의 안위와 품위유지를 위해 각반에 한명씩 채용하여서 유치원내 다양한 근무형태를 다 할 수 있게 부려 먹고는 이제와서 교육청의 예산 핑계로다가 한달 월급이 많지도 않은 직종에게 근거리에서 원거리로 강제 전보인 재배치를 보내고 있는 인천시교육청입니다. 이로 인한 노동의 강도가 살인적이고, 고용의 불안을 매년 받게 되는 직장갑질과 정리해고 수순에 맞서야 하는 인천공립유치원 교육실무원직종입니다. 교육현장의 약자인 우리는 쉴공간도 없는 근무환경에 자연감소 직종이라며 강제 전보를 보내서 고용의 불안과 강제 재배치로 빠진 교육실무원의 노동 강도를 남은 교육실무원이 하게 되어 살인적인 노동강도를 견뎌야만 하는 비정규직중 비정규직 차별 한파를 투쟁으로 견디어 보려고 합니다. 유치원 내에서 울직종에게만 희생과 차별을 언제까지 강요할까요? 몇 번의 면담과 직종교섭을 해야 인천시교육청이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 줄까요? 그래도 차별의 벽에 맞서 보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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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30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민현순 / 그 선생님은 학교비정규직입니다 그 선생님은 학교비정규직입니다                                                    교무행정지원사 민현순  새들도 집이 있고 풀꽃도 피었던 자리에 다시 피고 하루를 시작하는 해도 자리가 있는데 공무직은 없습니다.   가르치는 교사도 있고 책임과 존중을 배우는 학생도 있는데 존중받는 공무직은 없습니다.   꽃은 향기를 내고 배움은 지혜를 만들고 교사는 올바른 가르침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그곳에서 공무직은 그림자로 남습니다.   평등한 자리인 것 처럼 다스리고, 순응을 존중과 배려라는 이름으로 배우고 가르치는 그곳 교육현장   새 학기에 하는 입학식 학생들과 학부모에게 인사하는 자리 그곳에도 공무직의 자리는 없습니다.   학생들의 가치와 교사들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 백년교육의 자리 교육현장   그곳에서 공무직을 보는 시선에는 자리도, 존중도, 롤 모델도 없는 투명한 그림자로 남습니다. 교무실과 학교 어딘가에서 교사들의 심부름으로 손님맞이에 바쁜 어떤 선생님   그 선생님은 학교비정규직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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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55
  • 2021.11.30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노정숙 / 우리에게 그런 날이 올까? 우리에게 그런 날이 올까?    조리실무사 노정숙   비정규직!! 정규직인데 정규직이 아닌 직업군!! 아이를 키우면서 살림과 일을 병행 한다는 건 쉽지 않다. 그러던 중 알게 된 교육공무직 학교 급식실... 방학에는 아이들과 보낼수 있는 최고의 장점이 있었고 교육청 소속이라 임금체불은 없을꺼고 고용이 보장되어있어서 아이를 키우면서 하기 좋은 직업이였다. 하지만 마냥 좋은 것은 아니였다. 아침 일찍하는 검수와 급식시간을 맞출려고 하다보면 출근시간이 남들보다 더 빠르고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급식실 다니시는 분들은 거의 5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출근한다. 출근 하자마자 작업준비를 하고 아침 일찍 검수준비와 전처리를 시작한다. 처음으로 들어온 급식실은 한마디로 전쟁터였다. 열기는 엄청났고 기구들은 대형기구에 한번도 본적이 없는 큰 솥에 큰소리로 말을 해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처음 신규발령으로 학교 급식실 왔을 때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고 그만큼 모든 건 바빴고 빠르게 눈치껏 일을 해야만 했다, 혼나면서 일을 배웠다. 신규든 경력직이든 인수인계를할 시간도 받을 시간도 없는 게 급식실이다. 급식실은 누구를 가르쳐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급식 1분전 까지 시간에 쫒기면서 많은 양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바쁘고 긴장해야 한다. 몇백인분 양에 엄청 큰솥에 키보다 더 큰 삽으로 조리를 해야 하고 튀김이나 전하는 날이면 땀은 온몸에 줄줄 흘러서 어지러워도 급식시간 맞춰야 되기 때문에 쉬지를 못한다. 그런 날은 퇴근할 때까지 얼굴은 홍당무가 되고 속은 니글 거린다. 다른 공공기관과 비교를 하자면 학교은 식수 인원이 거의 두배다, 그런 식수 인원을 우린 당연시 여기고 견대 내야만 한다. 또한 지금 급식실은 노동 강도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오픈되어있는 급식메뉴!! 오픈된 만큼 다른 학교와 비교도 되면서 급식메뉴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다양성을 요구하고 있다. 예전처럼 급식이 밥만 먹는다기보다는 맛있는 음식에 질과 영양을 고루 갖춰야만 한다. 메뉴와 재료 하나하나에 모니터링 하는 학부모 기대치를 맞추려면 급식실 영양사와 조리직원들의 노동 강도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동안은 고용불안이 없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한다. 얼마 전 뉴스에 죽음의 급식실 보도가 나온 적 있다. 건강했던 사람들이 매캐한 연기속 조리실에서 8시간 일하다 보니 폐암에 걸린 조리원들... 유해물질 엄청나게 뿜어져 나오는 조리실에서 일해야만 하는 일터... 이처럼 열악한 노동 환경은 누구에게 개선을 요구하고 하소연 할수 있을까? 급식실에 대한 기사가 나오면 집회를 하고 교육청에 가서 하는 우리 시위는 단지 우리 얘기를 들어 주고 권리들을 찾고 싶을 뿐인데 불성실한 교섭태도로 일관하는 교육청!! 얼마전 급식 파업이 있었을 떄 사람들은 우리에게 급식을 볼모로 파업을 해서 돈을 받아내려고 한다라고 생각하고 말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학교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식당 아줌마라 말하고 보는 사람들의 시선... 일하면서 내가 가졌던 책임감과 나만의 자부심은 점점 내려가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방학 때 놀아서 좋다고 얘기 하지만 무급에 방학 때는 그동안 아팠던 몸을 충전 해야되고 근무 중 고생한 몸을 돌봐야 되서 물리치료도 해야 된다. 다음 학기에 또 일을 할려면 몸을 다시 충전 시켜야만 한다. 아침에 출근하면 갱의실에 파스 냄새가 나고 오후에 퇴근할 때는 땀 냄새가 진동을 한다. 가끔 동료들을 보고 있므면 마음이 찡할때가 많다. 정말 좋은 직업을 가졌다면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멋있다고 생각 하겠지만 급식실에 현실은 정말 저렇게까지 일하나 싶을 정도다. 땀이 온몸을 젖을 정도로 일하고 말 그대로 골병 나는게 우리 직업이다. 말이 좋아 교육공무직이지 식당보다 더 힘든 노가다라고 얘기 한다. 교육청에서 실시하는 안전보건 교육을 매년 4분기 8시간씩 받아야 한다. 근무 시간 내에 할 수 없게 현실이다. 업무량을 조절해서 하라고 하지만 업무량을 조절할만한 조건은 어느 조리실도 안될 것이다. 일을 조절할만한 업무가 아니다. 노동조건에 맞는 안전교육을 해야 한다. 하지만 비정규직의 현실이다. 하루는 12살된 막둥이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엄마가 무슨 일 하는 줄 알았다면서 일 그만 두면 안되냐고 울면서 말한 적이 있다. 엄마 급식실 일하는 줄 아는 아이가 갑자기 그러니 너무 놀랬다. 아들방에 들어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시청각 교육으로 급식실 노동법 동영상을 봤다고 펑펑 울었다. 대충 짐작이 갔다. 엄마는 그런 일 없다고 괜찮다고 하니 너무 속상하다고 우는 아들을 달래주고 나오는데 나도 눈물이 났다. 비정규직의 현실이다. 차별쯤은 견뎌야 되고 열악한 환경은 당연시 여겨야 되는..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하고 싶다. 일한 만큼 우리 권리를 찾고 싶다. 급식실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고 싶다. 화학약품에 노출되어있는 우리 환경을 개선하고 싶다. 내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에서 일한다고 자랑하고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다. 우리에게 그런 날이 올까?    
  • 학비노조
  • 867
  • 2021.11.30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노미춘 / 그날까지 그날까지     조리실무사 노미춘   다니던 직장이 경영악화로 문을 닫았다. 무얼 해야하나 고민끝에 지인으로부터 학교급식실이 매리트가 있다는 말을 듣고 학원을 다녀 한식조리기능사자격을 취득했다. 그리고 대체인력으로 두달반짜리 계약 후 다시 1년 다시 6개월짜리 계약직을 전전하면서 그 동안 중식조리기능사자격증도 취득하고 교육청 교육공무직 모집부분에 서류를 넣어 정정당당히 합격했다. 면접 합격하던 날 교육공무직에 합격했다고 주위에 많은 분들이 축하 메세지를 보내주셨다. 이제 나도 교육공무직 정규직이다라며 앞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듬해 1월 신규교육을 마치고 3월 1200명 가량의 중학교에 발령받았다. 전에 대체인력으로 일 했던곳은 1300명의 초등학교 첫날 시간이 어찌 지나갔는지 하루가 지났다. 하루를 무사히 보냄에 감사를 느꼈다. 전쟁터를 방불케했던 아침8시반부터 오후 퇴근시간까지는 화장실 갈 시간도, 물을 마실 시간도 잠시 쉴 시간도 허락치않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하루 지나고 이틀, 일주일 그리고 한달, 급여를 받았다. 정식으로 교육공무직에 합격해 열심히 일한 후 받은 급여는 정말 뿌듯했다. 하지만 알았다. 나는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이라는 걸 그나마 다행인 것은 1년 후 재계약 하는게 아니고 정년 보장되는 무기계약직 이라는 것을. 이런게 비정규직이구나 방학이 낀 달은 급여 차이가 많이 난다. 그리고 여름방학을 맞았다 7월은 방학이 끼여 반정도 일했다. 급여는 반토만 8월도 반토막 다음해 1월 중순경 겨울방학을 맞았다. 급여 반토막. 2월 청소일 수 4일과, 명절 상여금을 포함해 받은 금액에서 세금을 제하니 2월 급여는 20여만원 정도 이걸로 한 달을 살 수 있을까 외벌이라 한 달 공과금도 해결하기 힘들다. 남편은 교육공무직으로 학교 급식실에 발령받은지 3개월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학교 일에 적응하기도 전에 남편이 곁을 떠나고 두 아이들과 살아야 된다는 생각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아무생각도 없이 일만 했다. 그래야 사니까 정규직 비정규직 그런 생각도 못하고 61세까지 일할수 있다는 무기계약직에만 초점을 맞추고 일했다. 급식실에서 일하시는 분들 중 의예로 가장이 많다는 걸 알았다 그럼 그 사람들 생계는 어떻게 하나? 그렇다고 퇴근 후나 방학 때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다 이중 취업이 되어 학교에서 허락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방학 때 생계가 큰 걸림돌이 되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남편이 있을 때는 방학 때 쉬어도 별 무리가 없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내가 일해서 두 아이들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달 두 달 일하면서 일하는 것에 비해 급여가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수 150명당 조리원 한 명 일의 강도는 굉장히 쎈 편이다. 초등학교는 초등학교대로 힘들고 중고등학교는 중고등학교대로 애로사항이 많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내 직업 내 일자리이다보니 군소리없이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학교뿐만이 아니라 전국에 비정규직이 많다는 것도 그해 여름 총파업을 하고 서울 집회를 다녀오며 알았다. 그동안 나는 우물안 개구리였다는것도 새삼 느꼈다. 남편의 그늘 아래 남편의 보호속에서 잠깐 잠깐 일하다가 막상 혼자되어 살아보니 세상은 내가 생각한대로 돌아가는게 아니었다. 비정규직도 많고! 무기계약직도 많고! 아예 비정규직에도 끼지못하는 사람들! 최저임금도 못 받는사람들!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단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소리를 내야하고 누군가는 행동을 해야하고 누군가는 그 행동에 맞춰 이러한 불공정한 세상을 바로 잡기위해 싸워야한다는 것을... 우리나라에 비정규직이 이리 많았나? 무슨 비정규직이 이리 많을까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비정규직이 많다. 작년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를 개사한 학교를 빛낸 100인의 보물들이란 노래를 하면서 학교에도 비정규직이 이리 많았나 싶을정도로 많은걸 보고 놀란적이 있다. 들어보지도 못한 여기저기 곳곳의 비정규직들!!! 알면 알수록 세상이 너무 불공정하구나 대한민국은 비정규직 천지라는 것을 대한민국 국민들이 알까?? 갑자기 의구심이 생겨 씁쓸한 마음 뿐이다.   처음엔 당연히 학교에는 정규직들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학교안을 들여다보면 비정규직 천지다. 아침에 아이들 등교할때 학교지킴이 선생님을 만나고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받을때는 정규직 교사와 또 구별이 되지 않는 많은수의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들의 수업을 받는다. 오후엔 돌봄전담사, 방과후교사 쌤들의 돌봄과 수업을 받는다. 그리고 또한 급식실에서는 조리원, 조리사, 영양사등 비정규직 선생님들이 그날의 급식을 전담한다 이렇듯 학교의 하루는 무기계약직 기간제교사등 많은 비정규직 쌤들과 하루일과가 함께 진행되고 마쳐진다. 몸이 아파 쉴 때도 집에 일이 있어 쉴 때도 결코 편안하게 쉴 수 없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내가 쉬므로 동료들의 힘든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쉬는 것도 쉽지가 않고 일하는 도중 다치는 일도 부지기수다. 정해진 시간안에 요리가 완성 되어야하고 배식도 맞춰서 잘해야한다. 혹 배식양 조절을 잘못하여 나중에 오는 학생들에게 배식을 못하는 날엔... 배식사고에 따른 압박감과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는다. 언젠가 그날 메뉴에 탕수육이 있었다. 수제탕수육을 하는 날인데 아침부터 쉽지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내가 튀김옷을 입혀 기름솥에 넣어주면 파트너가 튀기고 건지는 일을 했다. 워낙 많은 양이라 튀겨도 튀겨도 줄지를 않고 배식시간은 다가오고, 피말리는 시간을 보내는데 조리사님께서 얼른 코팅솥 하나를 올려 같이 튀기라고 하셨다. 겨우 겨우 배식직전 튀김을 끝내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손만 겨우 씻고 배식에 들어갔다. 점심식사는 생각지도 못하고 끝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지금 다시 떠올려도 정말 맘졸이는 순간이었다. 이렇듯 늘 시간에 쫓겨야하고 배식량도 조절해야하고 특히나 안전에도 신경 써야한다. 바쁘다보니 종종걸음으로 다니기 일쑤고 그러다 보면 렌즈 벨브나 기구들 모서리에 부딪쳐도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우선 눈앞에 쌓인 일처리가 늘 먼저다. 일을 마치고 씻을때 보면 다리 여러저기 몸 여기저기 멍이 드는 건 예삿일이다. 물론 조심하지 못한 본인 책임이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바쁜 조리실 안에서 안전하게 일한답시고 천천히 일하라고 하는건 어불성설이다. 또한 청소할때도 위험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독한 약품 사용과 무거운 트렌치 세우는 일도 회전솥 위의 후드청소도 위험하고 뜨거운 물 사용할때도 위험은 언제나 우리곁에 도사리고 있다. 교육받을 때 독한 약품 사용이 우리 몸에 얼마나 해가 되는지, 안전하게 사용하라는 말을 듣는데 왜 굳이 독한 약품 사용하면서 그러한 교육을 하는지 교육하시는 강사님께 질문한 적이 있다. 단체급식이다보니 세균 때문에 이러한 약품을 쓸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안전하게 사용하라는 강사님의 말씀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점검 나올때 어느 정도의 얼룩과 세균은 넘어가 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거는 어디까지나 개인차가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독한 약품 사용과 위험천지인 이곳에서 나는 왜 일 하는가, 안하면 되지? 안하면 우리 아이들의 급식은 누가 해 준단 말인가 누군가는 해야되고 그 누군가는 바로 나인 것이다. 급식실 일이 하고 싶어 내 스스로 결정하고 들어왔다. 힘든 일도 있지만 이렇게 모두 힘든일만 있는건 아니다. 아이들이 급식을 맛있게 먹어 주고 맛있는 급식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런 말 들을때는 정말 뿌듯하고 이 일 하길 참 잘했단 생각이 든다. 그럴땐 모든 피로와 일하면서 느꼈던 고통이나 힘듦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조리원 한명 당 학생수 150명이 아닌 100~120명정도로 해준다면 우리의 일이 조금은 덜 위험하고 덜 힘들 것이라 한다. 그럼 산업재해도 덜 발생하지 않을까??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이 있다. 학교급식실일은 딱 10년만 해야 한다. 안그럼 병원 달고 산다. 실제로 10년 넘은 직원들은 손가락 관절과 어깨통증 무거운걸 들고 다니니 허리통증에 디스크 거기다 손목터널증후군 다리 통증 또한 종종걸음으로 다니다보니 족저근막염같은 걸 달고 산다. 수술하면 되지않냐고 하지만 수술을 하게 되면 회복할 때까지 수개월이 걸리기 때문에 최후보루로 남겨놓는다. 그 외에도 너무 힘들어서 !! 적응을 못해서 !! 다쳐서 !!. 아파서 관두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이렇듯 각종 위험과 고통이 따르지만 이 속에서 우리는 여성노동자로서 귄리를 찿고 동료애를 느끼고 아이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고 있다. 요즘은 맛벌이부부가 많다보니 요리를 할시간도 없고 못하는 사람들에겐 학교에서 먹는급식이 굉장히 중요하다. 한 예로 동생은 공부만 하던사람이라 요리를 정말 못한다 그래서 학교급식이 가장 맛있다고 하는 조카들 방학만 되면 아이들 밥때문에 곤욕을 치른다. 코로나로 인해 전체학생 등교가 중지되면서 격주로 학교를 가다보니 급식을 못해 아이들이 점점 더 말라가고있다는 말을 들었다. 배달음식도 질렸고 동생은 요리를 못한 데다 직장이 타지역으로 발령나다보니 집에는 아빠와 아이들뿐이라 집안일은 고사하고 먹거리가 가장 힘들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우리가 해주는 점심 한끼이지만 그 한끼가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한끼 식사인지 모른다. 이런 면에서는 우리가 자부심을 가지고 일 할만하단 생각이 든다. 이렇게 큰?일을 하는 우리에게 오는 급여라든가 복지는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방학때만이라도 어느정도맞춰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무기계약직이 어떻게 정규직이란 말인가 무기계약직을 정규직이라 할 수 없다. 정규직이라면 방학때 기본급이라도 아니 기본급에 몇10프로라도 줘야 되지 않은가. 방중 비근무에 ! 무노동무임금 !! 방중 기본급얼마라도 주든가 허울뿐인 정규직 이건 결코 정규직이라 할 수 없다. 모르는 사람들은 놀면서 기백만원씩 받아가면서 무슨 파업이냐고 난리다 하지만 속내를 아는 사람들은 절대 그런말 하지 못한다. 오히려 더 격려를 해주면서 몸 관리 잘하라고 한다. 이것이 방학중 비근무자가 처한 현실이다. 나 포함 외벌이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집안일하며 직장생활하는 전국의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 좋은 소식 처우개선을 위해 오늘도 교육청 뙤얃볕마당에서 열일하는 우리노동조합상근자들 부디 교육청에서 우리의 말에 귀기울여주고 우리비정규직의 처우개선을 위해 노력해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머리를 까까중으로 깎은 학생이 있었다. 급식먹으러 오면 늘 얼굴에 불만이 가득하고 더 달라고 했을때 남은 학생들의 배식량 때문에 미안하다 다음엔 더 많이 줄께라고 말하면 그럴 때마다 에이C에이C를 남발하고 거의 반항수준인데 등치큰 남학생이라 어떻게 나올까봐 내심 무서웠다. 그러길 여러차례 같이 화낼수가 없어 우리가 반항기와 불만투성이인 중2병학생을 살리자고 다음부터는 좋은말로 타이르기로했다. 또한 급식량도 더 많이 주며 맛있게 먹고 건강하란 말로 하다보니 차츰차즘 좋아지는 모습이 보이고 인사도 안하고 퉁명스럽던 말투가 몇개월 지난 뒤에 부드러운 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중3이 되어서 다시 만났는데 우리가 알아 볼 수 없었다 키도 더크고 머리도 길고 하니 정말 훈남학생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는 급식실에서 보통 밥하는 아줌마로 통하지만 한사람의 인생에 좋은 점을 끼쳤다는게 얼마나 뿌듯한지. 급식실에 오는 학생들 우리는 그냥 밥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학생들을 위해 애쓰는 전국에 있는 우리 급식실 선생님들 힘들지만 그래도 보람을 느끼며 안전하게 일해보고자 한다. 무기계약직이 아닌 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이 되는 그날까지 방학중 비근무로 생계걱정을 해야하는 방중비근무자들의 급여와 안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노동조합원들 승리하여 우리의 안전한 생계를 보장받읍시다.  
  • 학비노조
  • 910
  • 2021.11.30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김은주 / 언제나 내편 언제나 내편                                                         특수교육지도사 김은주   듬성듬성 파뿌리 보일 때 만난 언제나 내 편인 늦게 만난 내 친구   비정규직이어서 해고라는 나를 위해 함께 싸워준 늦게 만난 내 친구   쥐똥만 하던 내 월급 함께 싸워 소똥만 하게 해준 늦게 만난 내 친구   시들어버린 꽃처럼 살던 내게 햇빛을 비춰 세상의 눈 밝혀준 늦게 만난 내 친구   길을 잃어 방황할 때 내비게이션 같던 늦게 만난 내 친구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처럼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처럼 내 뒤에 네가 있으니 두려움 없네   내 친구는 노동조합 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이 세상 이별 날까지 우리 함께 하자 언제나 내편 하자      
  • 학비노조
  • 872
  • 2021.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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