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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공모전 입상작

학교비정규직 작품공모전 입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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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공모전 입상작

2021 학교비정규직 작품공모전 안내 사진
중요 2021 학교비정규직 작품공모전 안내 [ 학교비정규직 작품공모전 안내 ]     올해 7월에서 8월에 걸쳐 진행되었던 “비정규직 노동자의 목소리를 내다”라는 주제로 학교비정규직 작품공모전이 드디어 마무리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학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겪는 차별과 서러움, 여성노동자로서 겪는 일과 가정, 돌봄 등의 어려움, 나아가 이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한 수기와 시, 그림, 사진 등을 통해 잘 전달해주셨습니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 공모전에 응모된 총 76건의 작품 중 22분이 입상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심사위원은 수기 부문에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님, 시 부문에 이상임 시인님, 최종 심사로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박미향 위원장님이 수고해주셨습니다.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앞으로 열릴 공모전에도 관심 가져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노조에서도 지금 모인 작품들이 많은 사람에게 가닿을 수 있도록 더 고민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부 이름 직종 부문 대상 경기 유미향 돌봄전담사 수기 최우수 경기 권윤숙 조리실무사 수기 전남 이옥랑 특수교육실무사 수기 우수 전남 김현희 돌봄전담사 수기 인천 안성미 조리실무사 수기 경남 정수진 조리실무사 수기 경기 김은희 돌봄전담사 시 장려 울산 곽영미 조리실무사 수기 경기 권점늠 미화 수기 전남 김서현 행정실무사 수기 서울 김숙희 조리실무사 수기 광주 노미춘 조리실무사 수기 부산 노정숙 조리실무사 수기 인천 방애경 유치원교육실무사 수기 경북 윤정희 조리사 수기 대구 이준길 운동부지도자 수기 경남 임하정 영어회화전문강사 수기 부산 최낙숙 조리실무사 수기 경기 김은주 특수교육지도사 시 서울 민현순 교무행정지원사 시 부산 김수진 방과후전담사 그림 경기 박양미 조리실무사 그림                  < 17차 정기중앙위원회에서 진행된 시상식 사진>       심사평     심사의 말씀   최현숙 / 구술생애사 작가   글쓰기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 즉 생각과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남이 읽어주기를 원하는 글이라면 읽는 이에게 뜻이 잘 전달되도록 글을 매만지는 것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잘 쓰는 글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들이 있겠지만, 저는 관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건과 상황과 사람에 대해 남의 위치와 시선이 아닌 나의 위치와 시선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과 질문을 잘 풀어낸 글이야말로 진정한 “나의 글”이며, 그런 글은 혹 아직 잘 매만져지지 않았거나 문법과 맞춤법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더없이 매혹적인 글이라 생각합니다.   노동현장 뿐 아니라 그와 직결된 여성 개인과 가족 및 사회생활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들을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저 뿐 아니라 이 글들을 읽는 모든 분들이 많은 공부와 성찰과 질문들을 얻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결혼과 출산으로 경력단절이 된 후 다시 나온 사회에서 여성들이 부딪치는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 일 가정 양립의 어려움, 급식현장의 바쁘고 고된 노동 내용과 위험과 근골격 질환을 비롯한 갖은 질병과 사고들, 학교와 유치원 돌봄 현장 노동의 세세한 내용들, 미화원 노동자에 대한 체력검사 과정에서 겪은 모욕감, 비혼과 이혼과 사별로 한 가정의 생계부양자는 물론 부모 돌봄까지 도맡게 되는 여성의 생애, 남성 노동자가 학교 복싱 교육자로서 하는 제언, 급식 조리사에서 시작해 진보정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한 경험 등, 제게는 모든 글들이 중요한 공부거리였습니다. 심사위원 제안을 받았을 때 학교비정규직의 다양한 현장 노동자들의 말과 느낌과 노동 내용 및 노동조합과 개인의 성장과정을 배우게 되리라 기대했던 저로서는, 글을 주신 분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 고민 속에 “대상”으로 선정한 유미향 선생님의 글은, 돌봄 전담사로 일하며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겪은 많은 경험과 느낌과 고민뿐 아니라 그에 관한 세세한 기록들,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과 고민들, 답을 찾고자 생각을 넓혀주는 노동 관련 책을 찾아 읽고 그 배움을 내 현장에 맞게 재해석하는 과정, 나의 노동현장을 넘어 타인의 노동과 다른 노동들에 대한 공부를 통해 “노동”과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넓고 깊게 이해해 나가는 탐구 과정, 자기 성장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질문들이 상세하게 드러나 있어 좋았습니다. 노동조합 활동의 보람과 어려움과 더불어 노조 활동 안팎의 갈등과 섭섭함에 대해서도 자신의 느낌과 말로 잘 드러내 주셨습니다.   17세에 교무실 “김양”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심부름 노동을 시작해, 28년간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로서 호칭과 직책과 노동 내용이 변화된 과정들에 대한 김서현 선생님의 글도 마음에 깊이 남습니다. 학교 안 사람들의 식사 및 그 준비와 마무리를 오롯이 도맡지만 자신의 식사 시간과 "밥값"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억울함에서 출발한 투쟁들, “봉사정신”으로 시작한 감정노동이지만 끊임없이 봉사가 강요되는 노동 현장에서 돌봄 노동자로서의 분노와 자각, "보조 교사"나 "교육실무원"이라는 모호한 호칭에서 비롯한 노동 범주의 애매함과 갖은 치다꺼리 노동들, "보조"라는 단어에 갇힌 차별과 모멸감, 성별로 인한 젠더 차별과 함께 남성 상급자의 성희롱까지, 모든 여성노동자들이 겪는 차별에 대한 인식으로 노동조합을 찾아 활동하고 이를 통해 얻은 자기 정체성 확립과 노동현장의 변화, 노동조합의 성과와 과제 등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들도 좋았습니다.   한편 장차 돌봄 노동자로서 생각과 삶을 확장하는 데에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대부분의 글에서 보이는 한계에 대해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혹 나의 관점과 느낌이 가족중심주의와 폐쇄적 모성담론, 국가중심주의, 성과주의 등에 갇히지 않았는지 더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머니로서는 당연한 듯 여겨지지만 “자식 돌보듯이......”라는 표현 속에는, 여성을 가정과 모성 안에 묶어두려는 자본과 국가가 만든 족쇄에 여성 스스로 제 발을 채우는 측면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태도는 책임감이지 소위 “모성”은 아니라는 점에 대해 다양한 여성주의 글과 책들이 있으니 꼭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나아가 노동현장 및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넘어, 자본과 국가와 여성노동의 관계에 대한 공부와 고민이 더 이어졌으면 합니다. 자본과 국가는 여성이 가정과 사회에서 하는 모든 노동을 “사랑”과 “봉사”라는 이름으로 무임금과 저임금으로 묶어두는 착취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해왔고, 최근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이 불평등과 착취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아 돌봄 노동의 가치와 중요성 및 “돌봄 사회로의 전환”이 말로만 언급되고 있는 최근 상황에서, 돌봄 노동에 대한 인식과 처우의 대전환과 투쟁을 위해서는 현장 노동자인 여러분들의 경험과 목소리가 어떤 정책전문가나 연구자들의 이론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글을 주신 모든 분들이 계속 글을 쓰시기를 간곡히 권합니다. 글쓰기는 나를 돌아보고 나와 우리의 현재를 확인하며 미래를 전망하는 데에 가장 쓸모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글 제출 여부와 상관없이 학교비정규직 현장 모든 노동자들의 수고와 분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심 사 평   이 상 임 / 시인     올해 작품 공모전의 주제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목소리를 내다!”이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당하는 차별, 서러움, 고용불안 등의 문제와 특히, 여성노동자들이 일을 하면서 가정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시를 통해서 생생한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시를 써낸 분들 모두 주제에 잘 부합된 내용으로 자신의 일자리에서 겪게 된 고충들을 섬세하고 진실하게 표현해 주었다. 그 섬세함과 진실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시의 화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가에 대해 쉽게 전이된다.   한 작품, 한 작품에 모두 애정이 간다.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의 삶의 쓰라림, 고통, 그럼에도 견뎌내야만 하는 자신의 인생 앞에서 조금씩 전진하며 그 희망의 숲을 찾아가는 여정이 시의 행간마다 조용하면서도 치열하게 스며있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 뼈가 부러져 깁스를 해도 부축해 주는 이 하나 없는 비정규직의 현장. 도와주는 이 하나 없이 일을 끝내고 햇빛 하나 없는 의자에 앉아 허공만 바라보는 비정규직의 삶. 더 이상 허망할 수 없다.(류양희) 새들도, 풀꽃들도 자리가 있고 하루를 시작하는 해도 자리가 있는데 공무직은 자리가 없다. 투명한 그림자로 이 세상에 남아 있을 뿐이다.(민현순)   듬성듬성 파뿌리 보일 때 만난 친구, 해고된 비정규직인 친구의 방패가 되어 도와 준 내 친구, 시들어버린 꽃처럼 살던 내게 햇빛이 되어준 친구, 그 친구는 다름 아닌 학교비정규직 노동조합.(김은주) 남들은 모두 즐겁게 듣는 ‘토요일은 밤이 좋아’를 토요일엔 무서워서 텔레비전을 끄고 우는 딸 앞에서 할 말을 잃은 엄마. 엄마는 토요일도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만 한다. 늦게 오는 엄마를 홀로 기다리는 토요일. 그 긴 시간이 딸은 무섭다.(김숙희)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을 쳐도 늘 제자리. 베이고 데이고 살이 뜯기는 상처와 고통들. 자존감을 곤두박질치게 만드는 처우와 사회의 시선. 멀고도 험한 그 길을 견디게 하는 힘은 오직 투쟁뿐.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생존의 이유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옮겨 앉는 일이다.(노현정) 떨고 있는 미래, 서러운 불안을 안고 우리 함께 길 위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신윤선) 젊음을 등에 업고 열심히 지지고 볶았더니 이제 몸 여기저기가 아파서 고치고 또 고치고 고쳐서 다시 쓰는 일만 남았다. 그래도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 지금보다 나은 환경이 기다리고 있겠지. 그 희망으로 또 지지고 볶는다.(김준미)   산다는 것은 때로 풀잎의 잠을 풋풋하게 흔들어 깨우는 일, 어제보다 더 푸른 꿈의 발자국이 봄처럼 찬란한 영광의 함성으로 비정규직의 벽이 무너질 때 우주가 쿵, 하고 흔들릴 것입니다.(김은희) 온 종일 음식을 조리한 열 손가락은 밤이면 아려오지만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어주는 이들의 행복을 노래하고 밤이면 꿈속에서 희망을 조리한다.(김영애)   이 사회에서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만큼 고통스러운 일인지 작품마다 내면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중에서 쉽지 않게 세 작품을 가려냈다.   산다는 것은 (김은희)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 문제를 항의하러 교육부 앞마당에 모여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봄날에 진달래가 부풀어 오른다.’던가, ‘꽃잎 같은 숨소리를 내며 꿈이 커가는 아이들처럼 우리들의 웃음도 또르르르 구른다,’고 빗댄 표현들이 이 사회의 불의에 저항하는 무거운 주제를 유연한 비유와 일상의 가벼움을 통해 서정적으로 잘 표현해 주었다.   언제나 내편 (김은주)   ‘시들어버린 꽃처럼 살던 내게 햇빛을 비춰 세상의 눈 밝혀준 늦게 만난 내 친구’는 ‘학교 비정규직 노동조합’이다. ‘학비노조’를 이렇듯 다정다감한 친구로 의인화하여 표현함으로써 ‘노조’를 삶 깊숙이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공무직의 자리 (민현순)   이 시를 읽으면 첫 행부터 마지막 행까지 쓸쓸함이 감돈다. 새들이 살아가는 허공에서, 풀꽃들이 살아가는 땅 위에서, 지혜와 가르침이 매일 피어나는 교육현장에서 화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자리를 살펴본다. 그렇게 꼼꼼하게 살피는 데는 이유가 있다. 화자가 처한 공무직의 자리를 확인하고 싶어서다. 그러나 끝내 그 자리는 없다. 세상을 바라보는 섬세함이 돋보이는 시다.  
  • 학비노조
  • 2,911
  • 2021.11.30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김숙희 / 나의 하루   나의 하루   조리실무사 김숙희   온 몸의 관절 마디마디가 툭툭 끊기는 느낌과 함께, 나는 오늘도 학교로 향한다. 새벽부터 일어나 밤새 밀린 빨래를 하느라 녹초가 된 나는 학교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학교에 도착하여 준비를 마치고 나니 점심시간까지 약 4시간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몇 백명 아이들의 급식을 준비하기에는 촉박한 시간이다. 영양사에게 각자 담당한 메뉴의 조리방법을 다시 한 번 익히고, 이제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된다. 군대에서 볼 법한 많은 양의 재료를 씻고 다듬은 뒤 무거운 솥을 이리저리 옮긴다. 욱신욱신 몇 달째 지속되는 손목의 염증은 나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늘은 튀김 메뉴가 있는 날이다. 180도가 넘는 기름의 열기를 온 몸으로 받아내며 땀은 비오듯이 쏟아진다. 조리실은 이미 뜨거운 열기로 가득차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넘치는 재료를 뒤섞기 위해 삽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우리는 점점 더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아이들의 배식을 위해 준비한 음식을 바트에 나눠 옮기고, 아이들을 맞을 준비를 한다. 12시가 땡하고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내려온다.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은 오늘의 급식을 기대하며 한껏 신이난 눈치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는 아이들을 볼 때면 힘들었던 시간은 싹 잊히고 뿌듯함만 남는다.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며 쌍따봉을 날려주는 아이들은 매일 반복되는 힘든 일들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아이들의 배식이 끝난 후 동료들과 늦게서야 점심을 시작한다. 전쟁과 같은 오전 근무가 끝나고 진이 빠져버렸지만 오후 근무를 위해 밥을 제대로 씹지도 못하고 10분만에 후루룩 삼켜버린다. 식어버린 밥과 잔반들이지만 고된 일을 했던 터라 꿀맛이 따로 없다. 식사를 빠르게 끝마치고 8명의 사람이 발을 뻗기도 힘든 비좁은 휴게실로 가서 다리를 구부린 채 앉는다. 고작 10분 남짓한 쉬는 시간이지만 동료들과의 휴식은 천국과 같다. 거울 속에 비친 나와 닮아 보여서일까, 급식일로 인해 안 아픈 곳이 없는 동료들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독 지쳐보인다. 무거운 솥단지를 옮기느라 허리와 어깨는 나간지 오래, 이제는 어떤 병원도 소용이 없다. 앉아 있을 틈 없이 계속 서서 일하는 다리의 하지정맥류는 나아질 기미를 안 보인다. 진하게 탄 믹스커피 한 잔에 조리원의 애환을 애써 날려보내며 짧지만 달콤했던 휴식을 마무리한다. 배식이 끝난 후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식판과 음식물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독한 약품으로 무릎에 독이 올라 고생했던 것을 떠올리며 요리조리 피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식판에 딱딱하게 붙은 밥알을 떼어내기 위해 뜨거운 물과 세제를 섞어 초벌 설거지를 시작한다. 매캐한 수증기는 이내 조리실을 메우고 펄펄 김을 내뿜는 세척물에 이리저리 손을 담구었다 빼내며 연신 기침을 한다. 커피와 함께 식어버린 땀은 다시 온 몸을 적시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병원에 갔다. 손이 저리고 팔이 올라가지 않아 치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오늘도 당분간 팔을 쓰지 말고 무리를 해선 안된다는 의사의 반복되는 말에 의무적인 대답만 하고 병원을 나선다. 물리치료가 끝난 뒤 집으로 가는 길에 가족들을 먹일 음식을 위해 장을 본다. 무거운 장바구니로 인해 팔이 더 아파진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다. 학교에서도 내내 서서 일만 한 탓에 집에 오면 누워서 푹 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그러나 청소며 음식이며 집에 할 일이 잔뜩 쌓여있기에 나는 바로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오후 열시, 집안일을 마친 나는 내일 다시 험난한 급식실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눈앞이 깜깜해지지만 내일 나갈 급식의 메뉴와 조리법을 마지막으로 익히며 쓰러지듯 잠을 청한다.     이것은 10년이 넘도록 해온 나의 급식실 조리원의 하루를 담은 일기다. 출산을 하고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신경써야 하는게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조금이나마 더 잘 먹이고 더 잘 키우고 싶은 마음에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급식실 조리사 일을 시작했다. 그 조그만한 아이들은 이미 의엿한 청년이 되어있었다. 아이들의 커져버린 키만큼 나의 15년 동안 보낸 조리실에서의 시간도 빠르게 흘러갔다. 고된 육아와 일의 병행은 자신만만했던 내 젊음을 가져가고 관절염을 돌려주었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달려왔다. 결혼과 출산으로 단절된 경력으로 인해 나에겐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펄펄 끓는 물과 기름에 여기저기 화상을 입고도 버텨야 하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고되지만 아이들이 집에 오는 시간에 맞춰 일을 끝낼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요새 열악한 학교 급식실의 실태를 다룬 기사를 여럿 접하였다. 조리흄으로 인해 폐암으로 숨진 여성 노동자의 첫 산재 인정 기사,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은 조리실과 발을 뻗을 수도 없는 휴게실에 다닥다닥 붙어서 쉴 수밖에 없는 조리원들, 조리원 정원 감축 등을 다룬 기사는 여기저기 보이지만 정작 우리의 조리실 일상은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작년 코로나 19의 확산으로 조리, 배식, 방역으로 인한 삼중고로 이미 노동의 강도는 한계에 도달했다. 조리원 한 명당 100명이 훨씬 넘는 인원의 식사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한 시차 배식과 가림막 청소 등과 같은 추가업무는 정해진 노동 인원으로 대신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더 심각한 것은 열악한 조리실의 환경이다. 180도가 넘는 기름으로 인한 내부의 자욱한 연기와 열기는 환기가 잘되지 않는 탓에 사그라질 줄을 모른다. 턱없이 좁은 조리실에서 조리양에 비해 환기 용량은 매우 부족한 상황이며 조리 시 발생하는 유해물질은 눈과 호흡기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촉박한 시간 속에 빠르게 조리해야 하는 급식실 특성상 연기로 인해 눈이 따가운 채로 미끄러운 조리실 바닥을 이리저리 뛰어가며 움직여야 하는 까닭에 안전사고를 피하기가 쉽지 않다. 식판 사이, 식기나 개수대 사이에 끼이는 사고는 물론, 넘어져 무릎이 깨지고 뜨거운 식기나 기름에 데이는 산업재해는 흔한 일이 되었다. 체감 온도는 44도 가까이에 육박하고 열기로 인해 조리복은 이미 땀으로 적셔져 있다. 이런 작업 환경에서 오랜 초고강도 노동으로 근골격계 질환을 가지지 않은 동료들은 찾아볼 수가 없는데 저마다 손가락, 어깨, 허리, 무릎 등 온 몸의 근육과 관절은 조리 업무를 하기 위한 제 역할을 못하게 된 지 오래다. 위험한 조리실 안에서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조리원들은 언제 다칠지 모르는 상태로 살얼음판을 걷는 상황이다. 과거보다 여성의 직업이 다양해지고 일을 하는 여성이 많아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경력단절을 겪는 여성들이 나설 수 있는 무대는 많지가 않다. 따라서 많은 여성들이 청소노동자, 급식실 조리원과 같이 근무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 높은 강도의 업무를 견뎌내며 일을 할 수 밖에 없는데 최소한의 근무환경을 보장한다면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고를 최대한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제대로 설치된 환기 시스템과 적절한 인력배치, 위험한 조리실 속 빈번하게 발생하는 산업재해를 보장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고 급식실 조리원에 대한 인식 개선이 신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안전한 조리실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에게 건강한 한 끼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 환경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라본다.    
  • 학비노조
  • 1,813
  • 2021.11.30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김서현 / 17세 소녀의 과거는 꿈, 미래는 희망 17세 소녀의 과거는 꿈, 미래는 희망   구 육성회 김서현   책가방을 메고 잘 다려진 교복에 옹기종기 친구들과 깔깔, 낄낄 거리며 학교등교 할 나이인 17세 소녀가 사회초년생이 되는 날. 수업받으러가는 학교가 아닌 생애 첫 직장을 나가는 날이다. 행여라도 친구들 눈에 띌까봐 땅바닥만 보고 걷고, 또 걸었다. 학교에 도착 하자마자 선생님들 커피 심부름, 재털이 비우기, 숙직실 청소하기, 직원들 책상닦기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나의 이름은 첫날부터 “김양”이 되었다.“김양”2장복사해오소, “김양” 손님오신다네 차 석잔, 학교에 행사가 있으니 다과 준비하소.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이게 직장인가? 어린마음에 첫날부터 마음을 많이 다친날이였던걸로 기억한다.하루는 선생님과 서무과장님이(행정실장 전 직책)크게 다투신날이 있었다. 행정실에 재떨이가 날아다녀 맞았던 기억 안경을 쓴 나는 지금도 아찔한 기억이다. 친목회가 있는 날이면 나는 그야말로 행정실을 지키는 지킴이가 되었고,심지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직장내 “성희롱” 발언은 분위기 전환이라 하여 많이 들어야만 했었고, 주 업무시간에 왜 그리 사무실에서 담배는 아무 거리낌없이 피우는지 난 그저 잔 심부름 전담이 되어버렸다. 애경사가 많은 계절이면 워드로 주소작업하여 하루 종일 오리고, 풀칠하여 봉투붙이고, 우체국까지 먼 길을 걸어서 우편물 발송하고, 교장선생님 발령시는 관사(사택)청소며, 학교 화장실 변기청소, 하물며 여름에는 운동장의 잡초를 호미로 메는일이 많아졌다. 방학때는 급식이 없어 직원들 밥까지 해야했고, 행정실장님 교장선생님이 시키는 일은 아무말없이 하는 자가 되어버렸다. 시키는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당연시 하게 생각하였지만 10대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벅차고, 점점 감정이 없는 감정노동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배워야만 했다. 배우고 싶었다. 그래야지만 업무를 줄거라 생각했다. 당장 직장을 그만둘 수가 없어 방통고, 야간대학을 다니며 하루에 잠은 4시간으로 열심히 학업과 공무원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그치만 나의 몸은 건강이 허락지가 않아 늘 시험 당일만 되면 스트레스, 과로로 인하여 여러차례 입원과 퇴원을 하여 낙방을 하였다. 20살이 되던 대학 입학후 드디어 나에게 주어진 첫 업무 “세입”업무 급식비와 운영지원비를 지원없이 학부모 부담으로 받던 시절이고, 단기적인 외환부족으로 IMF사태가 생긴 터라 교육비지원(국민기초수급자)가정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미납금은 빈번하였고, 수납을 위하여 퇴근 후 가정으로 찾아가면 힘든 가정사를 들으며 남일 같지않아 할머니, 어머니를 서로 부등켜 안고 많이도 울었던 일, 차마 미납금을 납부해달라는 말도 못했던 기억, 지금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지원,감면제도는 정말 훌륭한 결정이라 생각하여 머리숙여 감사를 드린다. 2001년 학교회계가 도입되면서 인건비 보조를 받는 학교 육성회직원들은“해고”가 되어 막막했다. 지금까지 해오던 일이고, 학교업무를 배우는게 너무도 좋았기에 전라도를 떠나 경기도로 옮겨 더더욱 일에 매진하였다. 초등학교 행정실로 갔더니 갑자기 급식업무를 전부다 넘겨주셨다. 식단, 발주는 영양사님의 주 업무이면서 행정실에선 급식에 관한 모든 업무를 지시하는거에 싫은 내색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교육행정인 사이트로 접속하여 하나씩 배워가며 업무를 터득할 수가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11개월 근무중 고등학교 사립학교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근무를 시작하였다. 신설학교에 투입이 되어 공립과 다른 업무를 하다보니 새벽 출근, 자정이 넘어서 퇴근하는 일이 반복되었고, 어느날 기계같이 움직이는 모습에 자꾸만 흐르는 눈물은 나 자신도 주체를 못할 정도로 너무도 힘들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아마도 타지 생활의 외로움과 고향이 그리워 더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새벽 늦은시간 일기를 쓰듯 교육행정 전문사이트 자유게시판에 구구절절 적어내려가며 힘든상황들을 적으며 마음을 달래다가 다시 글을 삭제하기는 반복했던 나에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지금의 학교 차석선생님께서 그 글을 보시려고 그랬던 것 같다. 그분도 새벽에 업무를 하다가 우연히 글을 보고 읽어 내려가는데 다음장으로 넘기면 삭제되기를 반복하는걸 보셨다며 나의 타지생활의 힘든 점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다음날 아침 지금의 학교 차석선생님께 걸려온 전화 한 통의 목소리 전라도의 말투에 얼마나 울었는지— 곧 지금의 학교가 (구)육성회직을 뽑을 것 같다며 생각이 있으면 원서접수를 하는게 어떻겠냐는 제의에 무조건 원서접수와 면접을 거쳐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학교직원분들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속에서 근무하던중 학교에서 남편을 만나 화목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첫 아이를 출산하고 복직 하였을때 기능직 10등급 3호로 급여를 받고 있었으나, 예산이 부족하다며 다음해인 3월에 급여를 지출한 후 갑자기 서명을 하라고 지시하시는 거에 당황스러웠다. 서명을 하지 않으면 이 자리 욕심내는 사람이 많이 있다 하시면서 협박아닌 협박을 강요하시며 서명을 요구하셨다. 어디에 누구에게 하소연 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비정규직인 나에게 힘을 주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사용자분들은 학교 비정규직을 무시하기 일쑤였고, 마음에 들지않는다는 이유로 온갖 협박을 하기 시작하였다. “절이 싫으면 중이 가는것이지 절이 옮겨갈수는 없다”이 자리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리다.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지시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학교회식도 근무의 연장이라며 술을 강요하였고, 회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상사를 무시한다며 다음날 더 큰 보복이 따라오기 일쑤였다. 회식중 도우미 역할도 강요하여 거절하면 안되는 정도의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직위를 이용한 “갑질”을 하고 계셨다. 하물며 학교의 빈땅에 농산물을 지어드신다며 농산물 포트에 양배추, 김장용무씨앗, 김장배추씨앗을 넣어 출근시 밖으로 내어 물을 주고, 퇴근시 안으로 들여놓아 묘목을 가꾸어 땅에 심어 생산할 때까지 물을 주었다. 배추 뽑은다며 바쁘지 않으면 나와서 도와라, 커피몇잔 타와라, 직원으로 보기보다는 무보수 일꾼으로, 사적으로 개인적인 업무를 지시하시는 그 분은 존재이유만으로도 스트레스였다. 업무는 어떻게는 처리를 할 수 있었으나, 사람에게 시달리는 업무는 정말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우울증이 심해져만 갔다. 지금의 근무여건이 좋아진 건 2010년 학교비정규직 노동조합이 설립되었다는 소식을 TV, 언론에서 방송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꼭 내편이 생긴 것 같은 든든한 빽그라운드? 하지만 학교측에서는 가입조차 막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더욱이 근무평정 점수로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난 사용자가 무서워 눈치만 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이리 새 가슴이였고, 겁이 많았는지....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다. 사용자 측에서는 노동조합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 않고 파업을 참여한 직원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눈치를 주며 노동조합에 대한 안좋은 인식을 조합원들에게 세뇌교육을 시작하였다. 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에 최초로 가입하면서 왠지 모를 뿌듯함이 생겨났다. 내 편이 생긴 것 같은 뿌듯함 내 직종의 부당하게 내몰린 행정사무원(최초임용당시:호봉제에서-연봉제로 변경)연봉제 선생님들의 호봉제가 우선이라는 과제를 안고 뜻을 같이할 선생님을 찾으면서 “연봉제”를 “호봉제 단일화”의 과제를 놓고 교섭을 풀어가면서 연봉제 선생님들과 즐겁게 피켓시위를 참여하여,드디어 2018년 3월 10년간의 서러운 연봉제를 청산하고 호봉제 단일화를 이끌어 내었으나, 그럼에도 100%가 아닌 총경력의 30% 9급에6호봉, 사람들은 말합니다. 공무원과 똑같은 호봉이니 급여가 꽤 많이 올랐을거라고 그러나, 2012~3년부터 행정사무원티오를 일반직 정원티오에 포함하여 일반직과 똑같은 업무를 하게 되었고, 저희도 회계감사는 똑같이 받고있는 실정입니다. 학교가 적어 일반직 차석샘이 발령나면 신규9급 분들이오셔서 늘 옆에서 신규업무를 가르치는 담당자가 되다보니 제 업무는 늘 뒤로 밀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도 업무 하나하나에도 책임감을 가지며 열심히 행정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30년 가까이 일하고 9년 일한 임금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서러움이 밀려옵니다. 그것도 9호봉의 100%가 아닌 이상한 보수체계,,, 지금 행정사무원이 요구하는 사항은 단 한가지 경력 100%입니다. 하지만 “수용불가”라는 문구를 볼때마다 지난 28년간 일한 나 자신에게 미안해 지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렇게 욕심 부릴꺼면 당당하게 공무원 시험보고 들어오라고 누군들 그렇게 하고 싶지 않겠습니다. 저는 말합니다. 왜 공무원 시험을 보지 않았겠냐? 먼 과거 초등학교 근무하셨던 육성회직원분들은 자동으로 기능직 사무원으로 이직을 하고, 이직후 사무운용직을 거친분들은 교육행정의 시험을 응시할 자격이 주어져 전직하신분들이 많습니다. 이렇듯 저희도 똑같이 시험볼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하고 싶습니다. 저희는 공무원을 시켜달라고 한 게 아닙니다. 그저 일한만큼의 경력과 호봉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 그리 힘든 일일까요? 저희 행정사무원의 요구사항을 잘 살펴봐주시고 “수용불가”가 아닌 한번이라도 “검토”를 지나“수용”이라는 문구를 보고 싶은 마음을 간절히 담아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학비노조 간부님들 저희 조합원을 위하여 굳은일도 서슴치 않고 앞장서 주시는 정성에 감사드리며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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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30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권점늠 / 근지구력   근지구력 국민체력검진 미화원에게 꼭 필요한가   청소미화노동자 권점늠   “어머니 뭘 그리 유심히 보셔요” 책꽃이를 정리하다 제 가 21-4- 오산- 01125 호 참가증, 성명: 권점늠, 생년월일 :1955년 10월 12일 위 사람은 국민체력 100사업 체력인증에 참가하였기에 이 증서를 드립니다. 측정일 : 2020년 1월 29일 출력일 : 2020년 1월 29일 서울 올림픽기념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 직인이 꽉 찍힌 참가증을 보며 겸연쩍게 웃어본다. 이의 고등학교가 설립되면서 교육공무직으로 입사하여 2015년~2020년 까지 5년을 다니다 퇴직을 권고 받았다. 학교 특수직으로 일을 하고 싶으면 체력검진 3등급은 받아와야 할 수 있다고 행정실에서 이야기했다.   비록 이순이 넘은 나이지만 꽃처럼 고운 학생들, 예쁘고 든든한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에서 5년 동안 다니면서 힘든 것보다 보람을 느끼며 출퇴근했던 나날들, 아침이면 여행 가는 것처럼 분주히 출근하고 하루가 한 시간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들 오후엔 또 여행에서 돌아오는 것처럼 차에 올라 30여 분 차를 타고 가로수의 푸르름도, 창가를 스치는 도심의 경관을 바라보며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다니던 일터를 떠나려니 왠지 서운한 마음에 자식들의 만류에도 다시 다니고 싶은 마음에 체력인증서를 받아오려고 세 번을 도전해 보았지만 원하는 3등급을 받지 못했던 기억이 고개를 내민다. 사 남매 자식들 키우며 분주하게 내 사업할 때는 한가로이 나들이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언제 저렇게 다닐 수 있을까 부러웠다. 막상 자식들 뒷바라지하여 제각기 새로운 둥지 틀어 날아가고 이젠 여유롭게 살만하니 남편과 사별을 하게 되었다, 짝 잃은 기러기처럼 혼자 남은 외로움을 학생들을 바라보며 보낸 5년이 금방 지루하지 않게 지나간 나날이었다.   교육공무직으로 근무할 땐 병원에서 건강진단서만 제출하고 다녔는데, 특수직으로 다시 일을 하려니 3등급 이상 체력인증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20대와 30대, 40대, 50대, 60대 체력에 구분을 두어야지 똑같은 종목을 시키는 것도 불만이다.   근력, 심폐지구력, 유연성, 민첩성, 손발력 모두 2등급 이상을 맞았는데 근지구력만 미달이었다. 이유인즉 3등급 윗몸 일으키기 9개만 하면 3등급 인증서 받을 수 있는데, 난 12번을 했다. 하지만 떨어진 이유인즉 복부 비만이라서 2등급인 윗몸 일으키기 13번을 해야 3등급 인증서를 줄 수 있다는 담당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너무도 합당하지 않은 부당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오산 두 번 충청남도 아산까지 갔었는데 이거 웬일인지 평상시에 없던 혈압이 올라 시험을 쳐 보지도 못했다. 이유인즉 긴장성 스트레스로 혈압이 일시적으로 오르는 사람도 있다고 담당 직원이 말했다. 저어 일하고 싶어 체력검사 하러 왔으니 통과시켜주면 안 될까요, 애원도 해 보았건만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로만 여겨졌다. 참가증을 보니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체력검진 다섯 종목 2등급 이상 맞았지만 복부 비만 있다고 윗몸 일으키기는 3등급은 9개만 하면 되는데, 2등급인 13개 못하고 12개만 해서 떨어졌다. 일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었다고 학비 노조에 전화했더니 김보섭 국장님이 교육청에 전화하셨다더니 다시 다니게 되었다. 1년이 지났다. 계약직이라 올해 1월에 또 오산 가서 혈압 올라 못 받았다, 아마도 지난해 행여 떨어질까봐 두근거리던 가슴이 체력센터에 들어서니 가슴이 벌렁거렸다. 또 떨어지는건 아닌가하고... 평상시엔 혈압이 정상인데, 아니나 다를까 혈압이 높아 검진을 못 받고 돌아왔다. 학교에서 2시간 외출 쓰고 택시비 25000원 들여 타고 갔건만 혈압이 말썽을 부려 이번에도 쓴 입맛을 다시며 돌아오는 발걸음은 천근이나 되는 듯 무거웠다. 일주일 뒤 다시 의사의 소견서를 받아 오산에 가려니 코로나로 체력인증센터는 문을 닫았다.   행정실에서는 다른 지역에라도 알아보라는 이야기를 했다. 딸에게 말했더니 “어머니 그냥 여가 활동이나 하고 쉬셔요” 한다. 다니고 싶은 맘을 헤아리며 집에서 몇 시간 가는 충남 아산 체력센터에 예약을 하고 딸이 직장 연차 쓰고 같이 가서 3등급 통과하여 지금까지 7년째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   근력, 근지구력, 심폐 지구력, 유연성, 민첩성, 순발력 중 어느 한 부분이 좀 뒤떨어져도 육체적 건강에 별 지장 없으면 청소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평생 이순이 넘도록 해온 가사 일 여자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미화 일이라 생각한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의 수명도 점점 길어지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시대에서 일하고 싶어도 너무도 타당하지 않은 제재가 있는 느낌이 든다. 미스코리아를 뽑는 것도 아니고 일하려고 하는데 복부비만 있다고 2등급 받아야 3등급 인증서 발급받을 수 있다는 체력인증센터 직원의 말이 2년이 지난 오늘도 귓전을 울린다.   건강검진만으로 신체건강하다는 확인만 하면 되지, 이순이 넘은 사람들에게도 근지구력 외 근력, 심폐지구력, 유연성, 민첩성, 순발력이 다 3등급을 맞아야 일 할 조건이 된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기며 지면을 통해 내 의견을 말한다. 무력하게 노년을 보내기보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열심히 일하며 자식들에게 손 안 벌리고 또 손주들에게 용돈이라도 주는 노후를 보내는 것이 아름다운 삶, 행복한 삶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손가락이 두 개만 있는 사람도 피아노를 치고, 두 손이 없는 사람도 차 운전을 하는 분도 보았다. 나이가 들어도 근지구력까지 다 양호하면 금상첨화이겠지만, 여성들이 가정이란 울타리에서 자기 몸 가꾸며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학비노조에 가입하지 않았더라면 요즘 코로나로 방콕 신세로 무기력하게 나날을 보낼 것이다 아침마다 출근하며 즐기고 하루를 학교 이곳저곳을 손주들의 방을 청소해 주듯 부산한 하루 한가로이 영화를 보며 휴일을 즐기는 것보다 더 재미있다.   삶이란 한가하고 여유로운 삶만이 행복한 삶은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즐겁다. 무려 한 시간을 보내기보다 바쁘게 즐겁게 학생들이 뛰노는 천국 같은 꽃밭에서 함께 할 수 있음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별꽃은 하늘에 피어 있어 가끔씩 쳐다보지만 학교에서 핀 꽃은 별꽃 같은 아름다운 꽃들이 운동장에도, 복도에도, 교실에도 바라만 봐도 내 마음속 가슴 가득 사랑꽃이 피는 느낌이다. 화장실을 막혀놓아도, 휴지랑 음료수병을 복도에 버려두어도, 푸른 숲길을, 푸른 바람을, 밝은 태양을, 흐르는 구름을 따라 함께 흐르듯, 오래도록 꽃밭에서 일하고 싶다. 옛 속담에 “아이는 울어도 귀엽고, 어른은 가만 있어도 밉다”란 말이 생각난다.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꽃들의 전당 건강지키며 오래도록 꽃들과 함께 사랑하며 지켜보고 싶다. “해낸 것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들을 봅니다.”(미국 부통령의 말) “훌륭한 타협과 훌륭한 법은 마치 훌륭한 문장과 같다. 는 말도 생각난다. 내 자식 키울 때는 하루가 한 시간처럼 바쁘게 살다 보니 자식들과 함께 할 시간도 없어 그저 밥 주고 학교 보내고 서로 마주 보며 웃을 시간도 많지 않았는데, 모두 들 성장해서 떠나가니 주위는 허전하다 우연한 기회에 미화원을 하게 되어 7년이란 시간을 함께하며 힘든 일 보다 더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가는 듯 늘 꽃길을 걷는 것 같다. 이 느낌 오래도록 누리고 싶은 마음이다.   오래 살기보다 즐거운 일 하며 꽃같은 학생들을 바라보며 이쁘게 함께 웃고 싶은 생각이다. 젊은 사람들도 윗몸 일으키기는 많이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근지구력이 부족해도 이순이 넘은 사람들은 근지구력 좋은 젊은 층보다 청소는 한결 정성껏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한다. 이론과 현실은 상반 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까요? 이렇게 지금껏 일할 수 있게 도와주신 삶에 활력을 갖게 해 주신 학비노조 김보섭 국장님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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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30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장려상] 곽영미 / 소통이 정답이다 소통이 정답이다   조리실무사 곽영미   급식소 분위기가 왠지 어둡다. 영양사의 무거운 발걸음이 일하는 우리한테까지 느껴진다. 유치원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조리사님, 실무사님 아무래도 고민 좀 하셔야겠는데요....” “네 !!!! 그래도 설마 우리한테 먼저 의견을 물어보고 진행하지 않을까요??? 설마~~~~” 설마가 주는 느낌은 엄청나게 크게 현실로 다가왔다. 거의 18년 급식소 조리원 (처음 호칭)으로 근무하면서 맞이하는 변화는 전보라는 제도. 확신보다 두려운 감정이 앞서서 전보라는 체제가 우리한테는 넘 무서운 변화로 왔었다. 그 과정을 겪고 새로운 마음으로 배정받은 곳은 공립유치원... 하지만 학교라는 시스템은 모조리 버려야 했고 새로 배우고 익혀야 했다. 일단 늘 사용하던 기계사용법은 없어지고 새로게 배워야 했고 제일 황당하게 만든 시스템은 ‘간식’시간이라는 놀라운 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점심 급식 시스템으로 전처리, 조리 , 배식, 청소 시스템으로 급식이 끝나고 나서는 정말 누가 옆에서 쓰러져도 모를정도로 각자 일을 해 나가기도 벅찼다. 하지만 여기 유치원은 학교 일은 똑같은데 청소 마무리를 1차로 하고 있으면 옆에서 두분이서 바로 간식에 들어가는 재료 또는 준비를 하면서 음식을 만들어 내야한다. 다만 급식은 각 반에 배달하는 형식이고 주어진 급식시간을 지내고 나면 다시 식판과 그릇을 수거해서 다시 청소를 해야하는 하루에 두 번의 급식을 하게 만드는 시스템에 너무 놀라웠다. 다만 내가 여기로 배정 받기전에 이런 시스템이 있다고 알려주거나 선택사항이 아니라서 어쩔수 없이 묵묵히 받아 들이고 5년이라는 시간을 보낼려고 마음을 비우고 일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힘든 일도 알아주지 않으면서 방학때 급식이야기가 나오자 마자 앞이 캄캄했다. 뭐니 해도 급식소에서 일하는 강도가 너무 세다는 것이다. 일단 인원이 적어서 각자 맡아서 하는 일이 다른 학교랑 비교했을 때 너무 범위와 일이 많고 또 뭐니해도 같은 일을 두 번씩 한다는 것이 사람을 일에 쩌들게 한다는게 너무 컸다. 그런데 여기에 방학이라는 우리의 희망과 숨통을 트이게 하는 우리만의 휴식 공간이 없어지고 12달 계속 일하게 된다고 하니 캄캄할 수밖에....... 이런 일이 유치원 원장들의 모임에서 차츰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그러면서 점점 확정으로 이어진다고 하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 최종 합의를 다 본 상태에서 우리에게 의견을 물어본다고 오후 시간 짬을 내서 면담 신청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의 일 상태나 몸 상태를 묻기보다 어떻게 할거냐의 물음이 오히려 우리를 서럽게 만드는 상황이 되었다. 당연한 결과 “우리는 방학때 일하는걸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이분들한테는 이런 결과가 황당했는지 교육청과 손을 잡고 다시 방학때 급식하는 방향을 다시 모색하고 있었고 우리의 눈치싸움은 힘겹게 이어가고 있었다. 교육청의 결과 각자 유치원 알아서 방학 급식을 추진하라는 이야기.... 다시 한번 코로나19사태처럼 차별적인 대우가 우려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나 방향도 못 잡고 나만의 일이 것처럼 힘들어 할 때 노조측에서 손 빠르게 유치원의 영양사, 조리사, 실무사 등의 방을 만들어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켜주면서 서로 의견과 방법, 지금 우리가 처한 사항을 서로 공유하면서 의지하고 서로 뭉치는 계기를 보여 주었다. 교육청에 유치원 급식소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면담을 신청하고 모두 모이게 되는 순간은 오히려 우리의 존재가 너무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어진 일이라고 하라면 해야하는가 보다’보다도 우리의 목소리도 낼수 있었어, 오히려 우리의 목소리를 그래도 귀담아 듣겠다고 교육청 각부서 실무자들이 나와서 우리의 고충을 듣고 있는 이 상황 마저도 그래도 우리가 잘 하고 있는거라고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그 상황의 내용 중에 우리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말이 “그럼 월급을 고려하면 급식을 할 수 있는건가요?” 역시 원장 선생님과의 면담에서도 돈으로 우리의 급식행동을 알아보시려고 하던데 여기 교육청 실무자들도 돈으로 우리의 모든 행동을 결부 시키려고 하는 행동에서 마음이 많이 상했다.... 우리가 왜 방학급식을 힘들어 하는지 뿌리부터 알고 시행와 면담을 해야 하는데 우리의 의견을 무시하고 알아보지도 않고 시행한 결과 교육청 유치원 원장과 대립은 예고된 법칙이었으리라..... 사람이 하는 일이다. 왜??? 어떻게???가 먼저가 아닐까........ 유치원 방침은 항상 아이들이 우선이라며 우리보고 항상 아이들을 먼저 위하는 마음으로 급식소에서도 아이들에게 웃는 얼굴로 대하라고 하는데 그게 내 몸과 마음이 편해야 자연스러운 웃음과 행동이 나오는데 그냥 인위적인 행동으로 무슨 아이들을 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사소한 일인거 같지만 조금한 일에도 이제 관심과 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돌아보게 된다. 방학 급식 방법을 찾는 과정이 우리한테 많은 혜택을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번 일로 인해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 방침이 많이 참작되었다고 보여진다..,, 이번 일도 우리 모두 방향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 할 때 빠르게 행동으로 보여준 노조의 대처에 너무 감사하다... 조그만 촛불이 오히려 밝게 빛 날수 있는 횃불로 만들어 주었으니....... 어려운 일을 겪으므로서 그 사람의 됨됨이와 소중함을 느낀다는데 난 솔직히 이번 일에서 좀 등한시 한 경우에 속했다. 싫으면 다른데 전보 신청이나 하자고 .... 하지만 입원할 정도로 몸 상태가 악화되어 제대로 업무보기도 힘든 와중에도 앞장서서 우리들을 하나의 집합단체로 만들어 주신 조희진 영양사님께 너무 감사하고 나의 마음상태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어 이번 사태에도 그래도 한발 나갈수 있게 해준것에 감사합니다. 어렵거나 해결이 막막할 때 우리 곁에서 도와준 노조분께도 너무 감사합니다. 막상 닥쳐봐야 그 존재를 안다고 하는데 이번일로 너무 그 존재의 고마움의 느낍니다. 앞으로 조그만 소망이라면 다치지 않고 앞으로 남은 시간을 잘 보내고 정년퇴직하는 것이 바람이고 급식소에 관련된 일은 윗분들의 안일한 생각으로 실행에 옮기지 마시고 현장에 일하는 사람의 목소리부터 듣어주시고 같이 방법을 찾는 협조적인 관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닙니다.... 사람의 소리를 듣어주세요.....    
  • 학비노조
  • 1,540
  • 2021.11.30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우수상] 정수진 / 가지 많은 나무가 있어야 숲을 이룬다 가지 많은 나무가 있어야 숲을 이룬다.     조리실무사 정수진     올해 나이 44세, 한 남자의 아내이자, 중고생 딸 둘을 두고 있는 엄마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비정규직 노동자가 겪고 있는 희로애락을 품고 사는 평범한 노동자입니다. 평범한 노동자이지만 대한민국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는 특별한 면도 많기에 용기를 내어 도마에 칼질하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썰어 적습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거기다 두 아이의 엄마로 감당해야 할 일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지금 기억해보면 가장 가슴 분통 터졌던 것은 펜션이나 호텔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루에 13개 방을 일일이 정리하고 청소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입니다. 짧은 시간에 최대한 깨끗하게 해야 하므로 숨돌릴 새도 없이 손발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고생하고 받은 돈이 겨우 일당 5만 원이었습니다. 그조차도 ‘손님이 없다느니, 수입이 적다느니’ 하면서 일당을 떼이기 일쑤였습니다.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는 처지에 발만 동동 구르다 욕만 한 바가지 퍼주고 돌아서곤 했습니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내가 잘할 수 있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나에게 맞는 일을 고민하며 찾던 중에 학교 조리 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리를 좋아했고, 또 학생들에게 맛있는 점심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일이라니, 저에게는 매우 적합한 일로 생각했습니다. 학교 조리 일을 하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녔습니다. 신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행운이 저에게 찾아 왔습니다. 대체근무이긴 하지만 이 학교 저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마침내 2014년 거제도 모 초등학교에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기뻤습니다. 정식으로 출근하게 된 것도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당시 초등 2학년, 4학년)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들어오자마자 조리사 샘에게 ‘노조에 가입하면 모든 게 좋아진다. 꼭 가입해라’라는 말을 들었고, 큰 고민 없이 바로 가입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조리원으로, 조합원으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조리원으로 아이들에게 맛있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해준다는 자부심이 컸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이다 보니 더욱 열심히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조합원으로는 옛날처럼 혼자 아무 소리도 못 하고 당했던 내가 아니라는 당당함이 정말로 좋았습니다. 그래서 경남교육청으로, 광화문으로 노동조합에서 하는 일이라면 두손 두발 걷고 참여했습니다. ‘노동조합은 쪽수다’라는 생각으로 내 한 몸이라도 보태야 힘이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2017년이었습니다. 일명 ‘밥값 투쟁’! 밥을 짓는 조리원에게 밥값을 내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교육청 관료들이 했을 때입니다. 이 말은 대중교통 버스 기사에게 버스비 내고 일하라는 것이고, 택시기사에게 택시비를 내고 운전하라는 것과 같은 참으로 어이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경남 3,000여 명의 조리원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한 사람의 힘은 비록 적을지 모르지만 수천 명의 사람은 지세포 앞바다에 몰아치던 하나의 거대한 분홍파도와 같았습니다.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노동조합의 힘은 이런 것이구나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노조=빨갱이’가 아니라 ‘노조=우리의 삶이자 생명’이라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습니다. 당시 교육청 관료들이 밥값을 내라는 말에 고된 일을 하면서도 모두 밥을 굶었습니다. 거기다가 외부음식을 아예 가져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느그들이 그리 나오면 차라리 굶는 것이 낫다.’ 치사하고 더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2017년 밥값 투쟁은 우리가 이겼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당하게 대통령과 똑같은 정액 급식비 14만 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노동조합의 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동안 조리원은 조리 실무사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단순하게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 또한 높아졌습니다. 세월이 흘러 조합원이 된 지 7년 5개월이 되었습니다. 많은 것이 달라졌고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아직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많은 것이 좋아졌습니다만, ‘아직은’ 갈 길이 멀기만 합니다. 학교 현장에는 여전히 차별과 부당한 처우가 계속되고 있고, 특히 조합원 사이의 갈등(?)이 다양해지고, 또 깊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장은 한마디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는 모양새입니다. 가지가 많고 잎이 많은 나무는 바람이 불면 잎이 흔들려서 잠시도 조용한 날이 없다는 뜻이지요. 학교 비정규직의 직종이 가지라면, 날이 갈수록 늘어난 조합원은 나뭇잎입니다. 조합원 직종이 다양해지면서 조합원의 요구도 천차만별로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또 예전과 다르게 현장에서 나오는 말은 ‘노조 하니 너무 좋다’는 말보다는 불평이 더 많습니다. 예를 들면 같은 학교 비정규직 조합원인 영양사, 조리사, 조리 실무사의 관계를 놓고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극히 일부분일 것이라 믿습니다.   학교 급식은 우리 아이들에게 건강한 먹을거리를 먹여 튼튼하게 자라게 하고, 학생답게 주어진 공부를 잘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이 일에는 영양사, 조리사, 조리 실무사가 따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조합원임에도 ‘여사님, 아줌마’라고 부르면서 일방통행입니다. 심지어는 ‘일하는 만큼 돈 받으라는 둥, 이거 해!, 저거 해! 라는 둥, 조리기구를 집어 던지거나 소쿠리 운반 카(일명 원카)를 발로 차는 둥’의 모습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아닙니다. 심지어는 전보 발령을 받고 갔는데 아직 그 학교에 익숙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학교에서는 그렇게 배웠냐며 비아냥거리는 일도 있습니다. 정말 같은 배를 탄 조합원이라고 하기에는 서로에 대한 배려도 없이 너무 심하게 모욕감을 줍니다. 정말 아닌 건 아닙니다.   어느 날은 계란말이를 구웠습니다. ‘어떤 실무사는 1시간 만에 하는데 너희는 왜 1시간 20분이 걸리느냐면서 넌 능력이 문제가 있어’라고 할 때는 정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어느 날은 냉동 핫도그를 튀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속까지 튀겨지지 않는다.’라고 염려되는 부분에 대한 의견을 말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그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뿐이었습니다. 결국, 핫도그가 제대로 튀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리사 샘은 ‘니 애 같으면 먹이겠냐?’라며 오히려 저희를 탓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학교에 들어온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습니다. 저는 이때부터 핫도그를 먹지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노동조합이 차츰 안정화되자 집회가 있거나 하면 영양사·조리사 샘 중에는 ‘꼭 가야되냐?’고 은근히 활동을 못 하게 하기도 합니다. 영양사·조리사 샘이 행정상 조리 실무사에 대한 관리책임을 맡고 있다 보니 행정실이나 교장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합니다만 그렇다고 같은 조합원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안타깝고 어이없습니다.   이런 차별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이 악물고 조리 실무사로 당당하게 사는 이유는 이제는 중학생, 고등학생이 된 우리 아이들, 누군가의 아들, 딸들이 내가 지은 밥을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든든하게 곁에 있는 조합원 언니들 때문입니다. 학교 안의 인간적 차별과 함께 일어나는 것이 행정실의 예산 타령과 산업재해입니다. 현재 조리 실무사는 방학 중에는 비급여입니다. 그러다 보니 방학 두 달은 허리띠 바짝 동여매지 않으면 가정 살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학교 급식에 종사하는 직종이 영양사, 조리사, 조리실무사이지만 누구는 365이고, 누구는 방중 비급여라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임금은 ‘노동력의 댓가’라고 배웠습니다. ‘노동의 댓가’가 아닙니다. 노동력의 댓가라면 당연히 방중에도 급여가 지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사, 행정공무원, 영양사, 조리사(일부)는 365 급여를 지급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그나마 노동조합 투쟁 결과로 산업안전교육으로 일수를 추가해나가고 있긴 합니다만 행정실에서는 어떻게 하면 그 일수를 줄이려고 입만 열면 예산 타령을 합니다. 그리고 사망, 중상 등 중대 재해는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표가 안 나는 재해는 학교 안에서는 일상화되어있습니다. 이번에 발령받고 간 학교는 오븐 위에 후드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오븐 위 후드가 없었다면 그 많은 유독가스는 어디로 빠져나갔을까요? 조리실무사가 수년 동안 마셨을 겁니다. 또한, 일과를 끝내고 휴게실에 앉으면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말이 ‘아이고 허리야, 팔이야, 다리야’입니다. 몸 곳곳에는 멍이 없는 날이 없습니다. 조리 실무사 배치기준이 100명당 1인(고등학교)이다 보니 음식량도, 노동강도도 장난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무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노동 조건에서 아프지 않고 일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이제 44세이지만 몸의 건강은 환갑이 넘은 것 같습니다. 어릴 적 할머니가 앉으면 ‘허리야, 다리야’ 하던 말을 지금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조리 실무사 경력 몇 년도 참 소중하지만, 조합원 경력 몇 년이 더 소중하게 다가오는 지금입니다. 권리를 찾는 것도, 아이들에게 건강한 먹을거리를 먹이는 것도 혼자서는 안 되는구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구의 탓으로만 돌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다니는 학교부터 다짐도 하고, 실제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첫 발령지 초등학교에서 요즘 3식 고등학교로 발령받고 한 학기를 보내고 방학을 맞이했습니다. 한 학기 동안 3식 고등학교에 가서 ‘탄력근무제’를 바로 잡고, 조합원이 미끄러져 다쳤던 곳인 바닥공사를 하게 했습니다. 이러면서 노동조합은 간부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 스스로 깨고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직 학교는 울어야 젖을 줍니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교장도, 행정실장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했습니다. 그게 바로 노동조합에서 말하는 ‘정치’였습니다. 얼마 전 경남도의회 국민의 힘 모 도의원이 한 망언이 생각납니다. 방중 비급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 교육청에서 예산을 짰는데 ‘새 학기 맞이 급식 준비하는데 무슨 10일이 필요하냐? 하루만 하면 되지’라며 얼토당토않은 말을 했습니다. 만일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아는 사람이 도의원이었다면 그런 말을 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도의회에서 관철할 진보적인 도의원이 있어야겠구나’하고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정치라는 게 멀리 있고,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압니다. 노동조합 처음 가입할 때 마음이랑 지금 ‘진보정치’를 하자는 마음이랑 비슷합니다. 기대 반 우려 반이지만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일이라면,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면 가야 할 길입니다. 100세 시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지만, 노동조합이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잡은 손 놓지 않고 가고 싶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가 아니라 “가지 많은 나무가 있어야 비로소 숲을 이룬다.!!”는 것을 이제는 깨닫습니다.        
  • 학비노조
  • 1,527
  • 2021.11.30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우수상] 안성미 / 그날 아침 그날 아침   조리실무사 안성미   그날 아침은 유난히 분주했다. 메뉴도 복잡했고 게다가 학부모들의 요구에 맞춰 초등저학년과 초등고학년의 맵기 정도를 달리하라는 작업 지시에 우리 학교 조리실에 있는 모든 솥단지들이 풀로 가동되었다. 우리 학교는 초중통합학교로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식사가 한 곳에서 조리된다. 어쩔 수 없이 어거지로 끼워 맞춘 조리실은 동선도 너무 멀고 작업공간도 충분히 확보되어 있지 못한 상태였다. 알고 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솥의 내용물을 옮길 때 솥의 걸쇠를 걸어 반드시 고정시켜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 동료의 마음을. 작업공간이 협소해 아직 조리중인 메뉴를 위해서 빨리 비워주고 공간을 마련해 주려고 했다는 걸 말이다. 사고가 난 후 그 동료는 자신의 상처는 차마 보지도 못한 채 우리를 보고 미안하다고만 했다. 연신 미안하다고만 했다. 선생님께도 계속 죄송하다고만 했다. 장화에 들어 간 국으로 피부는 이미 종아리부터 벗겨져 흘러 내려 있었다. 동료는 신다 만 등산양말처럼 접혀서 포개있는 피부들을 차마 보지도 못하고 계속 미안하고 죄송하다고만 했다. 자신의 아픔과 고통보다 우리들에게 미안하다고 연신 말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속상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동료의 상처를 미처 다 살펴보지도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남은 국을 담고 조리하다 만 메뉴를 완성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듯이, 마치 아이들이 이 사실을 알면 안 된다는 듯이 배식대에 서서 습관처럼 아이들에게 밝은 목소리로 ‘맛있게 먹어’를 하고 있었다. 가슴은 벌렁거리고 손끝은 떨리고 있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 사이 동료는 119를 타고 오롯이 고통을 감내하며 쓸쓸히 병원으로 실려 갔다. 불안한 마음에 머리는 이미 하얘진 상태로 서로 조심하자고 독려하면서 그 날 일을 겨우 마쳤다. 사실 남은 일들이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날의 떨리던 내 몸만 기억이 날 뿐이다. 그 날 일이 끝난 후 나는 허탈감에 빠졌다. 나뿐이 아니라 그 상황을 목격한 모든 동료들은 마찬가지였다. 점심시간이 다가온 상황에서 일어난 사고라 식사 때를 기다리던 그 많은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고, 작업 중지나 지연에 대한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정상적인 급식이 진행되어야 하는 줄 알았다. 퇴근 후 집에 돌아 온 나는 소파에 풀썩 주저 앉아버렸다. 어깨에 매어있는 가방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다리에 힘이 풀린 채 온몸의 힘이 빠져버렸다. 한참을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으니 가슴 저 밑에서부터 통증이 밀려왔다. 눈가에 눈물이 고이더니 어느 순간 난 누가 죽은 것 마냥 아무도 없는 집에서 펑펑 통곡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의 정상적인 식사를 위해서 내 동료의 고통과 두려움을 외면해 버렸구나.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었지만, 상처도 보지 못하고 두려워 하던 다친 동료의 그 눈이 자꾸 떠올랐다. 이런 날은 정상적인 식사가 될 수 없는 날이었는데... 그날 배식대에 서서 습관처럼 ‘맛있게 먹어’라고 말한 내 입을 떼어버리고 싶었다.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서로 더욱 더 조심했지만 아직도 국 솥 앞에만 가면 지금도 가슴이 벌렁거린다. 한동안 그 동료의 상처가 뇌리에서 벗어나지를 않았다. 그 동료의 상처는 날이 갈수록 더 짙어졌고 선명해졌다. 그럴수록 어마어마한 고통에 함께 해주지 못한 죄책감과 미안함에 내 마음의 상처도 같이 짙어갔다. 더 짙어지는 상처가 우리의 외면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더욱 아파왔다. 그 동료는 이식수술을 하고 나서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치료에 진척이 없었다. 결국 아물지도 못한 상처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나마 집에 온 후 마음의 상처도 다리의 상처도 지금은 조금씩 호전되고 있다. 그 동료는 자기 상처의 치료보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면 일자리를 잃을까 봐 그 걱정을 지금 하고 있다. 그러던 중 얼마 전 화성의 모 고등학교에서 벽에 걸린 사물함이 떨어져 휴식중인 조리실무사 4명이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접했다. 9명의 조리실무사 중 4명이 다쳐 119에 실려 갔는데 그 날 5명의 조리실무사들과 대체인력으로 급식을 강행했다는 얘기였다. 그 날 다른 사고 없이 정상적인 급식이 진행 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너무 화가 났다. 9명의 일을 5명이 나눠서 했다면 분명 일의 강도며 일의 집중도가 엄청났을 텐데, 게다가 아침에 큰 사고를 목격했다면 그때의 나와 같이 불안하고 떨리는 마음이었을 거라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그 중 한분은 중상을 입어 하반신 마비라는 중증이라는데... 아무리 대체인력을 투입한다고 해도 그 대체인력이 기존 인력을 대신할 수 없음이 당연한 것인데 인원수만 채웠다고 조리에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한 학교는 과연 할 말이 있을까? 내가 우리의 사고로 접했던 그 마음을 이분들도 경험했으리라 짐작하니 너무 화가 났다. 뉴스 기사로 사고가 난 휴게실을 볼 수 있었다. 9명이 다함께 앉아 있을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좁아 터졌고 열악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그 장소가 휴게할 수 공간이 과연 될 수 있을까? 그저 옷을 갈아입기 위한 탈의실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협소한 휴게실에 둘 공간이 없어서 벽 중간에 허술하게 옷장을 매달은 업체도 화가 나고, 옷장을 설치한 업체에 책임을 묻겠다는 진심 없는 도교육청도 짜증났다. 그런 상황에서 급식을 강행한 학교는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책임을 묻고 징계를 하면 하반신 마비를 평생 안고 가야 하는 분은 누구를 징계할 수 있을까? 과연 징계 할 곳이 있기나 한 건가? 그리고 의문이 들었다. 만일 사고 상황을 아이들이 알게 되고 급식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아이들은 학교를 탓했을까? 그런 결정을 한 학교는 과연 그게 최선이었을까? 우리는 그냥 급식을 위한 도구였던 것일까? 학교에서 나는 그저 도구였나? 아물고 있던 그 동료에 대한 죄책감이 다시 몰려왔다. 한 번도 난 내가 급식을 위한 도구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난 그저 아이들에게 위생적이고 건강하고 이왕이면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맛있는 식사를 제공해 주고 싶었을 뿐이다. 이 일을 하는 분들은 모두 다 같은 마음일 것이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한 건 음식 만드는 걸 어릴 때부터 좋아했고, 미래의 우리나라 주인들인 아이들에게 위생적이고 맛있는 음식을 내 손으로 먹이고 싶어서였다. 이왕이면 내가 잘하는 일로 보람도 느끼고, 수입도 생기면 좋으니까 다들 힘들다 만류했어도 도전해 본 것이었다. 이 일을 시작할 때 나의 자녀들도 학교의 아이들과 비슷한 나이였기 때문에 정말 내 아이를 먹인다는 생각으로 정성으로 음식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마음 먹었던 것보다 일은 훨씬 험난했고 내 몸은 점점 더 망가져갔다. 학교는 안전하고 깨끗하고 반듯하지만 우리가 일하는 급식실은 사실 너무나도 치열했다. 퇴근이 빠르지만 일찍 출근하기 위해 남편 출근이며 아이들 등교준비를 새벽부터 미리 해야만 했고, 빠른 퇴근 후에는 정형외과며 한의원이며 근골격계 질환으로 병원들을 전전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오죽하면 매달 나오는 근속수당이 한달치 병원비라는 우스개 소리도 이제 농담이 아니었다. 쾌적하고 위생적인 작업장은 매일 작업 후에 독한 세제로 광내고 힘주어 수세미질 하고 뜨거운 물을 뿌려 유지해야 하고,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들도 매일매일 락스를 부어가며 물때가 생기지 않게, 음식물이 남지 않게 청결하게 유지해야 했다. 작업 중에는 팔팔 끓는 뜨거운 것들을 많이, 빠르게, 조심해서 다루어야 하고, 작업장을 이동할 때는 기름이 튄 바닥에서 넘어지지 않게 발바닥에 힘을 주며 장화를 신고 뛰어 다녀야했다. 또, 주어진 재료로 최대한의 맛을 끌어내려고 인터넷 검색도 해보고 여러 의견도 들어보고 하며 여러 번 손이 가게 정성으로 만들지만 식판에 담아 놓으면 볼품없어 보이기를 반복했다. 항상 조리 완료 후 2시간 안에 배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배식시간 전에 쫓기듯 조리를 완료해야만 했다. 배식 전 배식대에 서있으면 옷은 땀과 냄새로 쩔어 있고, 얼굴은 땀과 음식물 범벅에 미처 닦지도 못하고, 심장은 마치 100미터 달리기를 하고 난 듯 쿵쾅거리고 있다. 아이들이 내 앞을 지나갈 때마다 ‘맛있게 먹어’라고 내뱉는 말은 어쩌면 내 심장이 진정되기 위한 주문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들 배식이 끝나면 본격적인 우리의 2차전 100미터 달리기가 남아 있다. 엉망진창인 식판을 정리해서 세척실로 끌고 와 85도가 넘는 뜨거운 물과 세제로 불리고 1차 2차 3차까지 세척을 한다.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세척실에서 땀으로 따가워진 눈을 고무장갑으로 쓸어가며 다른 집기류와 도구들을 세척하여 마무리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원래 위치로 이동하면 2차 달리기가 끝이 난다. 식당과 작업장 불이 꺼져도 우리는 다시 마지막 3차전에 들어간다. 삶아서 세탁 한 수십장의 행주들을 널어 말리고 아침에 널어 두었던 빨래들을 뜨거운 소독고를 열어 정리한다. 그 와중에 한 번에 최대 3명씩만 샤워가 가능한 샤워실과 화장실에서 순번을 정해가며 샤워를 한다. 샤워를 하고 나와도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는 휴게실 온도와 습도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모두의 샤워가 끝나 가면 휴게실 온도가 떨어지고 퇴근시간이 다가온다. 그리고 우리는 병원으로 퇴근을 한다. 이런 하루하루 보내며 모두들 방학만 기다리고 있다. 방학이 되면 그동안 미처 치료하지 못한 근골격계 질병을 치료하고, 체력도 회복하고 다시 개학을 맞는다. 방학이면 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지만 이제는 근속 년수가 늘어갈수록 방학에 치료를 해도 질환들이 낫지 않게 되고 이제는 개학이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한지 벌써 6년째지만 방학이면 통화하는 나의 부모형제들은 방학이라 일도 안하는데 월급 나와서 좋겠다는 말을 아직도 하고 있다. 매번 아니라고 12번쯤 말했지만 급식실 밖의 사람들에게는 나는 그저 부러운 학교근무자이다. 난 그래도 감사했다. 내가 일할 수 있고, 내 수입으로 가정이 좀 더 여유로워지고, 내가 잘하는 일도 할 수 있고, 이 나라의 주인인 아이들에게 내 정성을 전해줄 수 있으니 말이다. 내 몸이 망가져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지만 아이들의 ‘감사합니다’, ‘잘먹겠습니다’라는 스테로이드계 약보다 더 쎈 처방이 있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사고들이 반복되고 그에 따른 대처들을 보고 나니 난 나의 생각처럼 정성을 다하지도, 마음을 다해서 음식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무리 최선을 대해도 나는 그저 급식을 위한 도구인데. 도구가 무슨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나? 내가 생각했던 사명감 따위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기에 깨끗하고 안전하고 위생적이지만 그 걸 만들기 위해서 땀범벅이 되고 있는 우리들은 산업 현장보다 더 치열하게 작업하고 있는데, 교육기관들은 그저 사고가 안 나면 전혀 살펴보려 하지 않는다. 사고가 나지 않기 위해 우리들이 하는 그 많은 치열한 행동들이 결국 다 질병으로 오고 있는데 말이다. 부디 안타까운 일련의 사고들로 휴게실 환경이 개선되고 작업 환경들이 개선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급식을 위한 도구들이 아니라, 안전하고 즐겁게 엄마의 정성으로 아이들의 식사를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는 100미터 달리기를 하더라도 그 앞에 기쁘게 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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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30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우수상] 김은희 / 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은                                                    돌봄전담사 김은희 진달래가 부풀어 오릅니다 세상을 일으켜 세우는 노동자들 교육부에 앞마당에 꽃으로 피었습니다   던져 준 낱알 몇 개로 참아야 했던 굴종의 세월 울컥울컥 도지는 설움인 양 지나가는 폭우가 한바탕 땅을 칩니다   꽃잎 같은 숨소리를 내며 꿈이 커가는 아이들 그 중심에 우리들의 웃음도 또르르르 구릅니다 산다는 것은 때때로 풀잎의 잠을 풋풋하게 흔들어 깨우는 일 온기가 있는 꿈의 발자국이 어제보다 더 푸릅니다   마땅히 피어야 할 곳에 찬란하게 피어나 봄을 부르는 영광의 함성 비정규직의 벽이 천둥소리처럼 무너지고   희망의 소식들이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칠 것입니다 우주가 쿵! 흔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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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30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우수상] 김현희 / 나희 학교비정규직은 현재 진행중   “나의 학교비정규직은 현재 진행중”,,,   돌봄전담사 김현희   가정주부라면 다들 아이 키우고, 살림하고 가정에 헌신하면서 희생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세상의 두려움이 한참 몰려올 때 경력단절을 심하게 느끼고 하루하루 정신없이 살다가 우연한 계기와 소개로 저는 초등학교 배움터 지킴이로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이 키우면서 저만의 고집이 있었습니다. `품안에 자식이다` 씁쓸한 말도 있지만, 제가 직장 다니지 않는 이상 제 품에 더 오래 품고 싶은 생각에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늦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후에 아이들 하교시간에 잠깐 하는 배움터 지킴이 자리가 우연히 다가왔지만, 가정에서 내 아이들을 끼고 있으면서 엄마의 사랑을 듬뿍 주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에 결정하기 까지 망설였던 부분이였습니다. 배움터 지킴이를 시작하므로써 저의 결혼 후 직장생활은 다시 찾아 왔습니다. 학교안의 병설 유치원에 아이들을 보내고 저 또한 학교안에서 아이들과 같이 있다라는 생각에 점차 이 일에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고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냥저냥 하면 된다라는 것이 배움터 지킴이 일 이라고 들었는데 이건 제가 일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고 초등학생들의 눈과 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존의 일과 다르게 틀을 깨고 업무에 임했습니다. 아이들 하교 시간에 출근하여 일단 교통정리를 해야 했습니다. 문구점이 바로 길만 건너면 있는 상황이라서 아이들은 오직 앞만 보고 양쪽은 보지 않고 건너야 하는 위험한 도로가 있었기에 하굣길 교통단속을 1순위로 하고 그다음 학교내, 외곽 순찰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위험한 놀이터 놀이하는 아이들의 보호자역할, 어디를 가야할지 방향을 몰라 둥둥거리는 아이들 대신에 길 찾아 길동무 해주고, 친구들과 다툼이 있으면 중제 역할을 하여 다시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화합역할, 이런저런 아이와 관련한 학부모님들의 요청에 응답과 학교와의 정보전달도 해줘야 하는 정보매개체 도우미 역할까지, 저는 어떤 상황에서든 나타나서 아이들의 해결사가 되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엄마의 마음이 작용했겠죠. 운동장 안에서의 놀이는 안심할 수 있는데 운동장 밖의 아이들의 놀이는 당연히 위험했기에 신경을 곤두 세워야 했습니다. 사각지대을 중점 단속하면 4시간은 훌쩍 가버렸습니다. 아이가 수업도중 교실을 이탈해서 담임선생님과 함께 아이를 찾아 나서고, 또 자전거를 타고 강진 관내를 쏙쏙히 찾아 나서야 했습니다. 오직 아이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밖에는 아무생각이 없었죠. 학교안과 밖, 도로 주변, pc방, 아파트 놀이터, 외진 곳 등등... 차가 오는 도로를 금방이라도 건널려고 하는 아이를 뛰어가 덥석 안아서 데리고 왔던 기억, 이아들을 찾아달라며 제게 요청이 와서 함께 찾아 나섰던 기억이 생생히 지나갑니다. 다행히 무슨 일이 없었기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학교 일이라면 무엇보다 발 벗고 나서고, 큰 학교의 특성상 행사나 일 손도 많이 딸렸기 때문에 당연히 무엇도 바라지도 않고 내 일처럼 가서 도왔습니다. 노동의 댓가가 뭔지도 모르고 학교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니 마냥 즐거웠답니다. 배움터 지킴이를 2년 하고 나니 학교의 새로운 초등보육 선생님을 뽑는다고 해서 저를 이쁘게 봐주시는 교무실 선생님들의 응원으로 지원하여 2012년에 초등돌봄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직장들어오기 전에 보육교사 자격증과, 사회복지사 등 여러가지 자격증을 취득해놨기 때문에 자격은 되었던 거죠. 아이들과 친구처럼 잘 지내고 내 아이보다 더 많이 보듬어 줘야겠다라는 마음으로 현재도 업무에 임하고 있습니다. 토요일은 체험학습이 있어서 반나절 이라지만 하루를 올인 해야 하니 몸은 천근만근으로 힘이 들더라구요. 아이들은 하루종일 뛰고 소리치고 뒹굴어도 에너지 소모가 안되는데 우리 돌봄선생님들은 체력고갈이 오더라구요. 오전에 병원가서 물리치료 받고 찾아오는 두통에 약을 먹으며 버티어 나갔습니다. 결혼과 동시에 경력단절을 겪다보니 제가 여기서 버티지 않으면 전 낙오자가 될 것 같아서 마음을 가다듬고 버텄습니다. 조금 힘든 체험학습이 토요일에 있어도 60시간을 초과하면 안된다고 하는 규정에 나머지 시간들은 봉사로 반납을 해야 했습니다. 박봉에 힘든 나날이였죠. 힘들어도 급여라도 보상을 해주면 더 나은데 하는 많은 회의감이 들어 서글픈 시간들을 참고 견디며 근무를 이어 나갔습니다. 정신없이 근무하다 보니 전남돌봄 들쓱날쑥한 시간도 천차만별, 소외감은 자존심과 함께 추락하고 학교에서는 별당아씨처럼 있는지 없는지 유령같은 존재처럼 전략해 버리고 물과 기름의 섞이지 못한 존재가 된채 시간제로 운영되는 돌봄은 학교 체험학습이나 행사가 있으면 관리자 맘데로 우리들의 시간을 농락했습니다. 어쩔 도리와 방법도 모르고 있었는데 학교비정규직 노동조합을 알고 노동조합을 믿고 들고 일어났습니다. 2015년에 노동조합을 가입하여 저는 강진 돌봄선생님들 중에서 최초로 가입했다는 이유로 강진돌봄의 대표직을 맡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리둥절 했지만 전남대표님의 소신과 강직함을 믿고 따랐습니다. 강진지역에서 몇 명 되지도 않은 선생님들을 모으고 힘을 합치고 우리들의 목소리를 내서 노동조합의 힘을 빌려 이야기 해보자고 하니 따르는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끝내는 뜻을 함께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돌봄선생님과 합류를 못하고 지금도 따로 국밥처럼 들어오지 않고 있답니다. 열심히 목소리 외치고 해서 이룬 결과만 얻어 갈려고 하고 무임승차는 당연지사고, 앞에서 못하면 뒤에서라도 밀어주고 힘을 모아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선생님들이 정말로 얄미웠습니다. 대표라는 역할에서 이분들과 함께하고 싶은데 도저히 설득이 안 되었지만, 언젠가는 함께하는 동지가 되고 우리들의 마음을 알아 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있습니다. 우리가 시간에 비해 더 많은 노동을 해 왔고, 희생만 강요할 수 없어서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은 마음에 그동안의, 체불 임금건 소송을 걸어서 전남 최초로 받아내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노동조합에 가입 안 하신 선생님들은 체불임금을 받아준다니 귀를 열고 소리를 듣고, 그들의 비굴한 모습을 보았지만 그래도 그들만의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 마음을 잡고 또 다 잡았습니다.. 2017년 제 각각인 전남시간제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에 전남 대표진들은 주말마다 모였고 또 주중 번개팅은 기본이고 각지역 대표들은 평일이고 주말이고 아랑곳하지 않고 목포,순천,광주,장흥 노동조합사무실에 아무 때나 모여서 회의하고 마음을 다잡고, 고난이지만 행복한 고난에,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고, 잘 도착했다는 전남톡의 수신을 듣고 잠자리에 들어 또 내일 할 일을 꿈속에서 이야기 하곤 했답니다. 전남 돌봄선생님들의 노고와 희생이 아니였으면 이루지 못할 시간들을(2018년) 통일시키고 5, 7시간들을 이뤄냈습니다. 우리들의 아픔,깡,슬픔,분노,눈물이 이룬 결과였습니다. 전남 돌봄이 시간 안에서 서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저는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우리선생님들과 노동조합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뤄내지 못했을 겁니다. 지금 저는 대표자리를 물려주고 조합원의 일원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전남돌봄의 시간제 통일의 기쁨도 잠시 저는 5시간제 돌봄업무를 하고 있지만 큰 학교의 특성상 28명의 아이들과 함께 하려니 힘이 벅차고 아이들을 보는 시간안에 행정업무를 병행하다 보니 머리에 쥐가 납니다. 뭔가 대안이 필요했습니다. 교섭 때 한 교실당 적정 아이들 수는 23~25명 대안을 둔다고 하였지만 대기자가 있는 큰 학교라서 한 교실에 28명을 안 받을 수도 없고, 학부모의 민원에 시달리다 보니 눈치를 안볼수도 없네요. 우리들도 여력이 되면 아이들을 다 안고 가고 싶지만, 그건 제 마음이지 다른 샘들게 강요할 수도 없고 현실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행정업무 볼 시간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들 보는 시간안에 간식짜고 서류일에 더불어 간식결제는 당연히 오전에 근무가 아닌 시간에 해야 하는 고충을 말도 없이 하곤 했습니다. 학교 관계자분들은 무엇만 해도 본인들 출장비 교통비 운운하는데, 저는 이런 잡음도 듣기 싫고 관내지만 나의 안전은 무시한 채 결제하고 간식준비 하로 다녔습니다. 하루는 생전처음으로, 느닷없이, 난데없이, 맹탕없이 행정실 직원이 와서 간식 염탐을 하기 시작하는데... 돌봄선생님들의 기분을 확 상하게 만들어 버려서 제가 행정실에 전화해서 그렇게 궁금하고 알고 싶고, 의문이 들면 염탐하지 말고 행정실에서 직접 확인도 하시고 간식 품의고 결제고 다 해달라고 했습니다. 저도 행정실에서 간식 담당해주면 정말 감사하죠! 정식절차 밟아서 오셔달라고 했습니다. 저도 힘들다고 했네요. 3교실을 책임져야 하는거라 간식일이 보통일이 아니거든요. 마치 우리 돌봄샘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려고 하는게 너무 억울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답니다. 관계자분이 그 소리를 듣고 실장으로서 권한을 가지고 있고 당연히 알아야 해서 그랬다는데.. 그럼 방법이 틀린거죠. 그렇게 못 믿겠으면 처음부터 품의하고 검수까지 행정실에서 했어야죠. 직접 아이들을 보고 있는 우리 돌봄선생님들이 더 잘아서 아이들의 식성과 무얼 좋아하는지 균형있게 선별하고 있는데 돌봄선생님들 마음에 찬물을 끼얹었던 행동에 화가 많이 났었네요. 제가 한 소리 했다는 소리에 관계자분들 조회 시간에 돌봄 간식 이야기가 나왔답니다. 교감선생님이 우리를 불러서 이런저런 이야기에 서운치 마시라고 했지만 그건 갑질 아니냐고! 했습니다. 이상한 사람들로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우린 시간제, 우리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라는 잔제가 깔려 있었고, 무언의 무시가 느껴졌습니다. 너무너무 속이 상했습니다. 우리들의 자격지심에 이런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닙니다. 그후에 서운했던 것 다 잊어버리라고 하더라구요. 당연히 행정실에서 알아야 할 권한이지만 정식절차를 밟아 주시라고 했습니다. 그 뒤 서로 오해도 풀고 현재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때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 들여졌다면 우리들에게 향한 의심과 눈초리는 부풀려져 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학교 일원으로 아직도 인정을 못 받고 살아 간다라는 게.. 소속감이라고 1도 없이.. 돌봄교실의 소중함도 알아야 하는데, 돌봄교실이 있어 학부모님들이 믿고 맡기는 안전한 곳인데, 학교는 오직 교사만 존재하는 공간인가요? 같은 중앙초인데 우리돌봄 아이들은 중앙초 아이들이 아닌 것 같은 느낌들? 5시간만 근무하고 가는 우리에게 무언의 멸시는 소속감을 갖고 싶은 계기를 만들어주는 저만의 오기였던 것 같습니다. 결코 저는 8시간을 갖고 싶은 마음으로 오늘을 달리고 내일 속에 날마다 침이 마르고 목이 세도록 외치고 기도합니다.   저는 5시간이라는 시간을 걸고 근무를 하지만 교육공무직 선생님들 중 교육복지사, 교무행정사, 상담선생들은 다들 8시간을 근무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정말 정말 부럽습니다!! 저도 8시간 할 수 있는데 왜 시간을 허락해 주지 않는지,, 전남도교육청과 교육부에 신문고를 두드렸고, 대통령님께 편지를 써서 돌봄의 상황과 전국 돌봄의 현황을 알렸지만 교육부로 이관되어 답변은 시,도교육청과 원활히 합의를 할 내용이라고만 답변이 오고 본인들도 그런 상황이 되면 협조 하겠다라는 형식적인 답변을 받고 실망이 컸습니다. 제발 이런 답변은 주지 말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책상 머리에 앉아 우리들의 노고를 알 리가 있겠습니까?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반영해야 하는 교육부는 서로 본인 업무가 아니라고 떠 넘기고 회피하는 일이 다였습니다. 돌봄의 국회토론회와 돌봄만의 투쟁을 거쳐서 서영교 국회의원도 만나 이야기 하고, 교육감 선거에 당연 조합원 선생님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돌봄선생님들의 노고가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노력 결과 교육감이 당선이 되었고, 약속은 당연히 지켜지리라 믿었습니다. 장석웅 교육감은 어렸을 적 옆집에 사시는 아재랑 똑같이 닮아서 친근감에 이분만은 꼭 당선시켜야 한다라는 열정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우리 교육감 뽑아 달라고 호소하고, 목소리를 높였던 일들이 스쳐지나 갑니다. 제가 봐도 정말 미쳤었죠!! 당선되니 다 잊어버리는 모르쇠 작전에 감탄했죠. 교육감을 닮은 옆집 아재도 조금씩 미움으로 바뀔려고 마음이 요동치기 까지 했네요.ㅋㅋ   옛말에 밭맬래? 애기볼래? 하면 둘다 마땅치 않지만 차라리 밭일한다고 하죠. 그만큼 아이 돌보기가 힘들다는 말입니다. 노동일인 밭매기도 정말 힘든데 밭일보다 더 힘든 일이 있었네요... 돌봄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이뻐하는 사명감이 없으면 절대로 절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곧 돌봄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엄마이기 때문이죠. 돌봄의 대책이 세워져야 한다고 전일제를 외쳤고, 행정업무를 가져와서 교사들의 수업을 방해할 만큼 힘들다고 한 일들 우리 돌봄 선생님들에게 시간을 주고 업무를 분리해주면 오죽 좋지 않겠습니까. 왜 간단한 것을 모르고 자꾸 헛발만 짚는지 모르겠네요.   8월4일 교육부는 초등돌봄교실에 관한 상황들은 발표했습니다. 확실히 시간이 풀린 전일제라는 말이 없어서 아쉬운 부분이 있었지만 각 시,도 교육청은 돌봄선생님들 그만 울리고 더이상 애태우지 말고 약속을 지켜서 아이들과 행복한 돌봄을 만들어가도록 지지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랏돈 헛으로 야금야금 드시지 마시구요. 아이들이 있어서 행복한 돌봄교실 아이들의 따뜻한 엄마속 품처럼, 사랑과 기쁨으로 보듬고 어루만져주는 우리 돌봄선생님들이 있어서 든든합니다. 이런 찐 엄마 보셨나요? 뭘 더 저울질 합니까? 다른데 예산 내럭없이 쓰지 말고 진짜 쓸 곳에 알차게 쓰십시요! 저의 전일제는 소리높여 외치고 함께 힘을 모으는 투쟁으로 계속 될 것입니다. 학교의 일원으로 8시간 근무하고 인정도 받고 업무와 아이들 돌보는 2가지 일을 무엇보다 자신있게 잘 할 자신이 있습니다.. 예쁜 이이들의 꿈을 소중히 키워가고 꿈을 이룰 수 있게 밑거름이 되어 주고 싶은 마음에 아이들과 있는 시간이 정말 행복하답니다. 9월 2학기가 다가옵니다. 코로나로 힘들지만 우리 돌봄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코로나가 비껴가는 곳, 무적의 돌봄전담사 선생님들이 근무하는 곳, 다른곳은 다 비대면이여도 초등돌봄교실만은 항상 대면인곳, 이런곳인데 어떻게 강인해지지 않겠습니까? 귀신잡는 해병대 저리가라죠~ 작년처럼 힘든 상황에서도 돌봄교실 운영 했는데 2학기 절대 두렵지 않습니다. 당당히 헤쳐 나가봐야죠.   그리고 우리들 뒤에서 항상 지지해 주시는 노동조합 관계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낍니다. 궐기대회, 피켓선전, 총파업투쟁 기타 등등에 항상 솔선수범하여 챙겨주시고 애써주시고 어루만져 주신 따뜻하신 분들이 계시기에 노동조합의 손을 잡고 믿고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노동조합이 없었다면 우리들의 목소리를 내고 이뤄냈을까요? 가망택도 없었을 겁니다. 두말하면 잔소리구요. 관계자 선생님들 전국돌봄 안쓰럽게 봐주시고 항상 살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글쓰는 제주가 없어서 요리저리 횡설수설 했습니다. 전국돌봄이 상시 전일제로 통일되는 그날까지 외칩니다!! 투쟁!!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이 올 때까지~ 노동조합 파이팅~ 그리고 아주 많이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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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30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최우수상] 이옥랑 / 15년차 비정규직 학교생활 레시피. 열정 양껏, 행복 맘껏. 쓰린맛 조금, 아린맛 조금.   15년차 비정규직 학교생활 레시피. 열정 양껏, 행복 맘껏. 쓰린맛 조금, 아린맛 조금.   특수교육실무사 이옥랑 # 선생님 책 읽어주세요 운동장에서 고추잠자리를 잡다가 교실로 들어갔을 때였나? 집에서는 수다쟁이. 학교에선 한마디도 않던 선택함묵 학생이 내게 입을 열었다. 순간, 그 아이의 입에서 쩍!! 소리가 난 것 같았다. “선생님!! 책 읽어주세요.” 그때의 감동과 전율은!!! 안 겪어 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 아이의 그 한 마디가 15년 동안 나를 있게 했다. 지금 생각해도 행복하고 보람찬 기억이다. 그러나!! 믿고 맡기셨다 생각했는데 ‘관망’이셨나 보다. 쉬지 않고 아이들과 놀아주다 맛보게 된 이날의 기억은 아픈 충고!!가 들러붙어, 행복과 쓰림이 세트로 떠오르는 추억이 되었다.   #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2007년 2월, 우리 아버지보다 연세가 많으신 특수교사 선생님이 내게 작별인사로 건넨 한마디 셨다. 순간, 얼어버렸다. 뭐지?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일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옮겨가서는 열심히 하지 말라는 말씀인가? 멘붕이었다. 해서, 나의 1년을 되돌아보았다. 특수학급 내의 수업시간엔 학생들을 거의 내게 맡기시고 선생님은 다른 수업을 준비하셨다. 선생님이 주신 문제집은 유치원 책이어서 풀고 나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 나머지 시간은 동화책을 읽었는데 나 한쪽, 너 한쪽 읽기, 구연동화 들려주기, 동화 장면 그리기 등등.. 동화책을 가지고 한참을 놀아주었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원래 자기 반인 통합반으로 돌아가는데 도움반 친구들은 통합반 친구들에게 섞이지 못하고 도움반으로 되돌아오기 일쑤였다. 나는 그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유치원 앞 모래밭, 소나무 아래 벤치, 덥거나 추울 땐, 도움반과 도서실에서 쉼 없이 재미나게 놀아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칭찬받아 마땅한데 “거기 가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 한 마디에, 나의 1년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듯, 너무 참담했고 ‘학교에서 나는 뭐지?’ 하며 내 정체성에 혼란마저 겪었다.   # 보조원 그런 충고를 들었음에도, 아이들 졸업식에 선물을 들고 찾아갔었다. 내 일을 너무 좋아하고 자랑스러워까지 했던 나는! 열정이 과한 특수교육 보조원이었다. 그랬다!! 그때는 직명도 보조원이었다. 보조원이 보조만 해야지, 아이들과 너무 주도적으로 학교생활을 한 것이 화근이었나 보다. 어쩔 수 없이 여기선 그리 뒀지만 다른 학교에 가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셨나 보다. 아이들과 책을 가지고 열심히 놀아주었고 그 결과, 선택 침묵 학생이 학교에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상을 받아 마땅한 나의 행동은, ‘보조와 지원’에만 그쳤어야 했는데, 첫 열정을 아이들에게 너무!!! 쏟아부은 실수를 하고만 것이다. 선을 지켰어야 했다. 가르치고 아이들에게서 성과를 내는 것은 교사의 업무이지 보조원의 업무가 아니었다. 그래, 내 잘못이다. 2021년 5월. 올해다. 고등학생을 맡아 지원!! 하는데 체조시간이었다. 아침에 새천년체조로 일과를 시작하는 체조시간이었는데 다른 반에, 다른 학년 학생들까지 갑자기 많은 아이들이 체육관에서 새천년 체조를 하게 되었다. 영상을 보며 체조를 하는데 갑자기 영상이 꺼지고, 음악만 나오는 상황에 모두 렉 걸린 컴퓨터 화면처럼 우왕좌왕 헤매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나는 평소처럼 영상을 보지 않고 아이들과 체조를 하는데, 체조 순서를 외우고 있던 나는 “어깨돌리기~” 하며 평소 하던 대로 아이들 앞에서 체조를 하고 있었다. 순간 멈춰있던 체육교사에게 나의 행동은 교사처럼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단다. 이 사실을 우리 담임 선생님한테서 전해 들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영상이 끊겨 순서를 헷갈릴 때 앞에서 하고 있으면 힌트를 얻어 얼른 구령을 하며 아이들을 평소대로 지도하면 될 일이다.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다는 건지 모르겠다. 같은 교사가 그리했으면 “언제 다 외우셨어요? 선생님 덕분에 잘 넘어갔어요.” 이렇게 웃으면서 넘길 일이다. 이게 뭐라고 “선생님, 아까 체조 때 하신 것은 앞으로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다. “선생님, 나는 늘 그렇게 하잖아요. 하던 대로 우리 반 아이들이랑 체조 한 거예요. 평소대로 한 건데요?” 했더니, “앞으론 그렇게 하지 마세요.” 한다. 너무 좋은 우리 담임선생님마저도 이리 말하는데, 기가 턱, 막혀서 너무 답답했다. 그런데, 더 기암할 일은 우리 특수교육실무사 실에서 이 상황을 얘기하고 의견을 묻는데 7명 모두, 내가 잘못했다는 것이다. 어떤 선생님은 그랬다. “과하게 뭘 하지 마!! 열정적으로 하지 마! 그렇게 하라잖아. 과하게 하는 걸 그들이 원치 않아!” 즉, 그들이 원하기에 보조라는 이름 안에 우리 스스로를 가둔 것이다. 법에 올린 문건을 만든 사람들이 보조원이란 통칭(명칭이 아니다. 각 치료사들과 함께 보조인력들을 통칭하여 보조원이라 기록한 것이다)과 업무내용을 법에 올리면서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직명도 보조원이라 법에 명시하고, 전국적으로 사용하게 했다. 1:1 맞춤교육계획을 세우고 교수활동을 하는 것은 교사의 업무이니, 보조원은 그저 특수교사의 지시와 관리에 의해 움직이는 감히!! 지도할 생각은 못하게, 그래서 특수교사와 부딪힐 일이 없도록 만든 것이다. 갑자기 일제 강점기의 우리의 얼(정신의 중심)마저 바꿔 지배하려 했던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이 생각났다. 내 생각이 너무 과한가? 아니다!! 생각마저 지배하려 했던 일본의 관리방식과 보조원이란 이름 안에 살아있는!! 사람을 생각 없는 죽은 사람으로 가둬버린 ‘그들’의 관리방식이 뭐가 다른가? 마음을 주고 정성을 다하여 아이를 돌보는 행동 자체를 ‘선을 넘는 행동,’‘지도’로 규정하여 ‘도발’로 보도록 만들어 버린 것!! 교사와 특수교육지도사(나는 이 직명이 옳다고 여긴다)가 서로 돕는 동료의 관계인데, 특수교육보조교사로 시작한 명칭을 보조원으로 만들어버리고, 특수교사의 지시·관리를 받는 자로 법에 명시하여 특수교사와 보조원을 갑과 을의 관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게, 그것도 학교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집으로 보내는 학교 안내장에 ‘엄마는 가장 좋은 선생님입니다’라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안전교육과 바른 생활습관을 학부모님께서!! 집에서부터!! 잘 지도해주시란 내용으로 보내진다. 나 또한, ‘엄마처럼 내 아이다 생각하고 장애학생을 잘 돌봐주세요’ 부탁받고 채용되었다. 그래서, 내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놀아주는 것처럼 아니? 내 아이보다 더 최선을 다해 읽어주고 놀아주는데 이런 것은 ‘지도’이니,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저 밥 먹이고 화장실 뒤처리해 주고 그림자처럼 보조만 해달라는 것이다. 책을 읽어주는 것이 교사선생님이 하면 지도가 되고 이옥랑 실무사 선생님이 읽어주면 지원이 되는, 사람을 급을 나눠 가르치는 이런 일이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다. 나란 사람이 학교 안과 밖에서 각기 다른 사람이 아닌데도,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지도는 허용이 안 되는 그저!! 보조원이어야 하는 것이다. 특수교육실무사는 관리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존중 받아 마땅한, 특수교사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동료다. 그 안에 사람은 없고 그저, 관리하기 편하도록 만든 이름과 법!! 의도가 그러하기에 너무 나쁜 법이고 너무 나쁜 이름이다. 이것은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 “보조선생님~ 여기 와서 이것 좀 도와주세요” 학교 내 비정규직들은 직종이 80여종이 넘는데도 불구하고 업무 겹침이 거의 없어, 업무가 곧 직명이 되고 직명이 곧 호칭이 되어 불리웠다. 시간과 노동력을 요하는 일들이 많아, 선생님들이 수업에 집중하는 시간이 적으니 교수활동 외 업무들을 종류별로 나눠 계약직을 고용하여 맡겼기 때문일 것이다. 즉, 비정규직 선생님들이 학교 안에 없었으면 정규 선생님들의 업무가 얼마나 방대했으며 그 업무처리 하느라 학생들에게 할애해야 할 시간들이 얼마나 침범당했을 것인가? 지금도 정규교사 선생님들의 업무가 많아서 수업 중에도 팝업이 뜨고, 간간이 불려나간다. 즉, 학교 내 비정규직 선생님들은 정규 선생님들이 해야 할 일을 나눠 준 고마운 동료인 것이다. 그런데도 급이 낮은 비정규직으로 생각하고 “공부 안하면 저렇게 된다”며 조롱하는 사람들까지 있다고 하니 참!! 참담하다. 그래도, 업무가 직명이 되고 호칭으로 불려지는 것은 바로 잡았다. “저기~ 보조쌤, 이것 좀 도와주세요” “스강쌤 피구해도 돼요?” “상담쌤, 상담실에서 놀아도 돼요?” “여사님, 국물 좀 더 주세요!” 이런 상황이 공문이 시행되면서 바로 잡아졌다. 학교 내 모든 교직원은 선생님으로 부르고 호명할 때는 이름과 선생님을 붙여 부르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호칭의 문제를 다른 곳도 아닌 학교에서, 공문으로 시행해 바로잡은 것도 너무 황당하다. 학교가 얼마나 급을 나누고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이 사람에게 맞나? 아닌가? 따지고 차별하였으면 민원이 들어와서 공문으로 시행이 되었겠나? 학교가 정말 학교다우려면 비정규직의 처우를 법대로!! 처리해야 진정, 학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처럼 모든 교직원들에게 바르게 응대하고, 학생들에게 그리하도록 가르쳐야 그것이 진정한 학교인 것이다. 가르치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른 이중적인 학교에서 이중적인 생활을 배워 나간 학생들이 우리나라를 바르게 이끌리 만무하다. 가르치는 것과 행하는 것이 같아야, 배운 것을 행하며 우리나라를 바르게 바꿀 것이다. 역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고 더 나빠지는 이유는 교육계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교육계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   # 68만원 받아요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편도 50여분 거리를 다니면서도 출근이 즐거웠다. 지각할 것 같으면 미리 택시를 탔다. 택시비로 얼마를 썼는지 계산도 안 해봤다. 9시 전에 출근해서 5시까지 근무하는데 쉼 없이 아이들과 재미나게 놀아주며 월급날 받는 돈은... 차 떼고 포 떼고, 68만원 정도!! 차라리 집에서 쉬는 것이 더 나았을 그때 그 시절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행복하고 보람찼으니 됐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기보다, 받는 급여와 사람을 함께 묶어서 평가하고 정리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데, 2006년 그때나 15년이 지난 2021년 지금이나 그 사실은 변하지 않고 더 견고해지고 있다.   # 자네가 거기 왜 앉나? 학교를 옮겨 더 열심히 특수교사선생님과 학생들을 보조하다 보니, 다음 해에 그 학교에 다시 채용이 되었었다. 새로 오신 교사 선생님 7명과 특수교육 보조인력 1명. 그래서 환영식 테이블 여덟 자리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행정실에서도 환영식이니까 그곳에 앉으래서 앉았는데 교감선생님이 갑자기 “자네가 거기 왜 앉나?” 하며 쫓아내셨다. 너무 황망했다. “네?” 하며 교감선생님을 바라봤는데 “저리 가 앉아요.” 하더니 기존 교직원 옆자리로 가라고 하셨다. 정규 교직원과 비정규직은 한 테이블에서 밥도 먹지 못하고 환영도 못 받는 건가? 이건 정말 따라올 것이 없다. 쓰린 기억 중 가장 센 기억이다. 13년 전 일이고 요즘은 이런 일들은 없다. 아마도 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을 하면서 우리 선생님들이 현장을 바꾸신 결과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교과서 밖에서 참교육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알려주는 참 선생님들은 바로!! 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선생님들이신 것 같다.   # 그대 없이는 못 살아~ 환영식은 너무 아팠지만 그 학교에서의 생활은 정말 즐겁고 행복했다. 엄마보다 연세가 많으신 특수교사 선생님께서 “우리 이옥랑 선생님은 버튼만 누르면 만들어내는 자판기 같아.” “그대 없이는 못 살아~”노래를 부르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안팎으로 학생만 생각하시며 어떻게 하면 원리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 늘 고민하시던 선생님이셔서 아이디어를 주실 때마다 만들어야 할 교구가 늘어났고, 선생님이 O.K 할 때까지 다시 만들기를 반복하다 보니 새로운 일들은 끝나지 않고 계속 쌓여갔다. 5시 퇴근을 못하고 6시 넘어서 퇴근하면서 혼자 울기도 했다. 기쁘게 자원해서 열심히 했는데 눈물 나게 힘든 건 어쩔 수 없었다. 너무너무 필요한 사람, 그래서 늘 바쁜 사람. 기쁘고 기분은 좋은데 몸이 힘들어 눈물 났던 2년이었다. 지금은 만든 교구보다 사는 것이 더 예쁘고 안전하다며 구입하여 쓰고 있다. 요즘 교구들이 정말 잘 나온다. 참 다행이다.   # 17개 시도교육청 중 전남만 무기계약전환 배제 교육부에서 인건비를 받는 11개 직종은 당연히 무기계약으로 넘어갔다는데, 유일하게 전남만 특수교육실무사 직종을 배제시켰다. 다른 시,도는 당연 무기계약직이라는데 전남만 아니라고 해서 생후 8개월 된 아이를 안고 전남 도교육청 칼파람에 맞서 피켓을 들었다. 최종 사용자인 전남 도교육청마저도 우리를 차별하여 버리려 한 것이다. 피켓을 들고 있는데 교육감 선생님의 차량이 지나다 멈춰섰다. 그리고는 내 피켓의 문구를 보고 정문을 지키던 주무관님께 뭐라뭐라 말을 건네고 가셨다. 그 주무관님이 내게 와서 전해 주셨는데 “저거 확인해 봐.”라고 하셨단다. 말이 안 된다. 수장이 몰랐을 리 없다. 어쨌거나 다행히, 무기계약 전환 공문이 내려오긴 했다. 선생님들과 돌아가며 무안 칼바람을 맞았던 기억,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욕지기가 나오는 기억이다.   # 시간제 일자리 특수부터 하다, 하다 정부마저도 우리를 버리려 했다. 장애영역 지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일로 치부하였고, 학생들에 대한 정보나 현장에 대한 파악이 없었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정책을 밀어붙이려 했을 것이다. 교육부가 나서서 특수교육 대상 학생들과 특수교육지도사들을 버리려 한 것이다. 2015년 1월 '시간제일자리 특수부터'라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전국학교비정규직 노동조합에서 반대성명서를 발표하고 개인적으로는 1월 6일 국민신문고에 투고를 하였다. 전국 특수분과 분과장 이하 조합원들이 신문고에 함께 글을 올리는 등 온 힘을 다해 막으려 애썼고, 1월 15일엔 학비노조 간부들과 교육부가 면담을 했다. 정말, 하나가 되어 대처하고 막았기에, 사람도 ,학생도 없는 숫자만을 위한 충성정책! 기업스런 일자리 정책은 그렇게 없던 일이 되었다.   벌써 6년이 지났다. 우리 사용자도 우리 정부도 버리려 한 일을 나는 너~무 사랑한다. 백만돌이 같이 꺼지지 않은 나의 텐션은 그래야 설명이 된다. 어떤 학생도, 어떤 상황도 이제 감히!! 예견이 되고 파악이 되는 15년차다!! 칙칙하고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밝고 유쾌하게 만들어 준다는 긍정과 희망의 아이콘! 해결하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는 일을 조용히 해결하여 주는 해결사! 불편한 것을 편하게 바꿔주는 맥가이버! 터덕대고 설은 관계도 부드럽고 친하게 만들어 주는 평화전도사! 함께 일하고 싶어하는 선생님들이 생겨난, 나름, 인기쟁이! 내가 이리 쓰니 부끄럽지만, 자평이 아니라 들려오는 소문이... 소문이~그렇다는 얘기다 ^^;;; 길이 없었기에 전국학비노조와 길을 만들며 걸어왔다. 이제는 체험했기에, 내가 가면 길이 된다는 것을 믿는다. 또한, 함께 걷는 이들이 더 많아졌기에 더 열심히 가 보려 한다. 포장 공사까지 마친 길을 걸어오는 후배들이.. 원래 있던 길인 줄 알고 선배들을 대접해주지 않더라도 그들과 가 보련다. 이 길을 버리고 다른 길을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의 어제는 보람찼고 오늘도 행복했으니 내일은 반드시 더! 행복할 것이다. ~~♪♬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 ♬ ~~유~후!!     .  
  • 학비노조
  • 1,763
  • 2021.11.30
[2021학교비정규직작품공모전 최우수상] 권윤숙 / 급식실 노동자의 삶 급식실 노동자의 삶     조리실무사 권윤숙   새벽 5시,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 밥상을 차려놓고 부랴부랴 집을 나선다. 어깨며 허리며 근육통이 채 가시지 않은 몸을 이끌고, 6시 전에 버스를 타야 했다. 검수 준비를 위해서 7시에 출근을 해야 한단다. 이제 막 입사한 나로서는, 이해하기도 항변하기도, 너무 벅찬 출근길이었다. 아이들이 9살, 10살이 되면서 재취업을 해야겠다 마음먹고, 공고문을 보고서 장거리 학교 급식실에 원서를 냈다. 한번 떨어지고 두 번째 합격한 터라,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리면 아이들 휴대전화, 집 전화를 총동원해서 깨우고 일을 들어갔다. 그러면 집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었단다. 10살 형이 동생을 깨워서 식은밥을 먹이고, 씻기고, 전기, 가스를 확인하고서야 학교를 갔다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인 나는, 정신없이 일을 했다. 늦지 않게, 식지 않은 따뜻한 점심을 먹이기 위해 말이다. 그러다 갑작스레 비가 쏟아지는 날도 있었다. ‘ 비 맞고 오겠네. 우산 가지고 갔나?’ 아이들은 비에 흠뻑 젖어 돌아오고... 아픈 맘을 내색할 수 없던 나도, 아이들도 그렇게 단단한 돌이 되었다. 여기서 누구라도 힘들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이들이 정말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아이들은 사물함에 여유분 우산을 놓고, 아침마다 일기예보를 보는 습관을 가졌다. 일을 시작하면 휴대전화를 볼 수 없었기에, 급한 연락을 하기가 어려워, 하루는 큰아이가 아빠한테 연락을 한 일이 있었다. 중요한 회의에서 벨이 울려 난감한 상황에서 사장님이 받아보라 하셨단다. “아빠, 오늘 비 와요?‘ 당황스러운 질문에 마지못해 ’응‘ 이라고 대답했던 남편은, 지금도 그때도 아이들과 내가 얼마나 힘들게 버텨냈는지 다는 알지 못 한다. 중간에 아이가 열이 나서 병원에 갔더니 뇌수막염 의심이 나와, 검사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병원에 입원하고 네 식구가 며칠을 병실에서 자고 출근을 했다. 학교에 양해를 구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해 감원이 있다 해서 차마 말을 못 했다. 장거리에 아이들이 어리니, 아무래도 그 대상이 내가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일이 서툴렀던 나는, 민폐 끼치기 싫어서 되지도 않는 속도를 맞추다, 다리가 호스에 걸려 갈비뼈를 수도꼭지에 부딪치는 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역시 말을 못 했다. 참고 퇴근한 후 다음날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어서 하루 쉬었다. 퇴근길에 넘어졌다라고 하고 말이다. 그때는 감원의 대상이 된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컸다. 그렇게 힘들게 힘들게 버티며 받아든 월급 내역서... 88만원 세대라는 말을 TV에서나 들어봤지, 그런 월급을 받아보니 ’이거 계속 다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봉이라 그런지 일에 대한 자긍심도 갖지 못 했다. 어디 가서 엄마 급식실 다닌다는 말 하지 말라고, 애들이며 남편한테 신신당부하기 일쑤였고, 누가 알기라도 하면 죄지은 것도 아닌데, 부끄러웠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1년을 보내니 무기계약직으로 전환이 되었다. 박봉에 힘든 육체노동이라고 자긍심도 갖지 못한 직장이었는데, 막상 무기계약직이 되니, 해고의 불안정 속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심신의 안정이 찾아왔다. 겁많은 사람이라 이 눈치 저 눈치 보다, 미뤄뒀던 숙제 같은, 전국학교 비정규직 노동조합에도 가입했다. 급여의 변화도 생겼다. 근속 수당이 생기면서 경력자의 처우가 나아졌다. 단순히 월급의 상승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면 미래에 나도 저 정도의 대접을 받을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힘들게 일하면서도 선배님들은 그랬다. 무리한 작업요구를 요청해도 해야 된단다. 왜? 라는 의문에 ’남의 돈 벌기가 쉽니? ‘ 라는 말로 얼버무리며 ’억울하면 출세해야지‘ 라는 패배주의를 무심코 받아들였다. 이렇게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많이 배우지 못한 패배자들일까? 쉽게 구할 수 있는 직업이니, 마음대로 부리고, 쉽게 해고해도 되는 노동자일까? 어느 해, 한 국회의원이 ’밥하는 동네 아줌마‘ 라고 비하하는 일이 있었을 때, 한 앵커가 이런 멘트를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의 추억에도 교집합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도시락‘일 겁니다. 도시락은 추억인가 하면, 또한 노동이었습니다. 매일 새벽이면, 서둘러 일어나 챙겨야 했던, 반복되는 그림자 노동! 그래서 어머니들에게 학교급식 전면시행은, 해방의 날이었고, 혹자는 도시락에서 해방된 날을 일컬어 ’여성해방‘ 의 날이라 말하기도 하더군요. 도시락은 또한 계급이기도 했습니다. 서로가 비교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그깟 계란 하나에 아이들의 계층이 갈리고, 남모를 열등감과 낭패감을 하루 한 번씩 겪어야 했던... 그래서 어머니들 마음까지도 상처 입게 했던... 그러니 도시락이 없어지고 학교급식이 시행됐다는 것은, 그 모든 도시락의 추억과 어머니들의 끝없는 노동과 특히나 교실에서 일어났던 계층의 갈등까지도 모두 공교육이 대신 책임져 주었던 커다란 사건이었습니다. ’밥하는, 동네, 아줌마‘ 늘 하는 일이고 그것도 누구든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뭉쳐진, 이 세 단어의 조합으로 인해 상대를 업신여긴다는 뜻이, 필연적으로 강해지는 그 발언... 그러나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도시락의 추억과 어머니의 노동과 교실에서의 차별을, 대신 짊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달랑 세 단어로 비하되기엔, 그들이 대신해 준 밥 짓기의 사회학적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나는 이 브리핑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 번도 이런 정중한 표현으로,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다. 같이 사는 남편도, 자식들도, 심지어 같은 공간에 있는 학교 사람들도 모른다.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면서, 동료들 간 화합하며, 시간 내에 위생적으로 음식을 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브리핑을 들으며 나도, 수많은 학교 급식실 노동자들도 자긍심을 가지길 바란다. 우리는 그저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환경미화원들이 쓰레기를 치워주지 않는다면, 재벌들도 깔끔한 사람들도 쓰레기더미 속에 파묻히고 만다. 어떤 것은 귀하고, 어떤 것은 하찮은 일 같은 것은 없다. 우리의 일도 그렇지 아니한가? 평소엔 아무도 느끼지 못 하다가, 파업을 할 때에는 온갖 저주의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이들을 볼모 삼아 뭐 하는 짓이냐며, 아주 나쁜사람들 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댄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이렇게 밥 한 끼가, 급식실 노동자들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나? 그런데 정작 평소엔 왜 그리 하찮게 대하는 걸까? 파업을 하면 불편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가 날 것이다. 그러나 그 분노를 노동자에게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다른 편에서는 사용자에게 항의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환경미화원들이 파업을 할 때는, 시장 집 앞에 쓰레기를 갖다 놓고 성실히 교섭해서 해결하라고 한다는 것이다. 파업은 노동자들의 최후의 보루다. 사용자가 성실히 교섭하지 않을 때만 갖는 법적인 권리이며, 학교 비정규직 파업이 있을 때, 우리 사회도, 애들 밥 굶긴다고 노동자들을 손가락질 할 게 아니라, 교육청에 성실히 교섭해, 파업을 끝내라는 항의 전화를 할 수 있는 성숙한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랜다. 또한 귀족노조라며 파업을 부정하는 인식도 점차 바뀌길 원한다. 노동자들도 특히 육체노동자들도 일한 만큼, 정당한 댓가를 받고 지식층만큼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하고, 우리도 생각을 바꿔나가야 한다. 그렇게 몇 번의 파업이라는 소용돌이를 겪으며, 5년이 지나 전보라는 제도가 시행되면서, 근무지를 집 근처로 옮길 수 있게 됐다. 새벽 5시에 기상하지 않아도, 어둠을 뚫고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그동안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도, 고등학생이 되었다. 잘 자라준 아이들도 기특하고, 고비도 많았지만 힘든 일을 묵묵히 해내온 자신도 대견하다. 8년 차 급식 노동자로 살면서, 온갖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고,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지만, 천직처럼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일을 하고 싶다. 그래서 앞으로 희망이 있다면, 학교 급식실 일자리가 힘들기만 하고 박봉인 나쁜 일자리가 아닌, 자식들 키우며 먹고 살 만하다 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중년여성들의 일자리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남자 조리사들도, 젊은 청년들도 하고 싶어하는 질 높은 일자리로 자리잡았으면 좋겠다. 방학 중에 비근무자들의 생계대책도 마련되어서 생계불안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해 본다. ’나는 자랑스런 학교 급식실 노동자‘라는 말을 하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란다.    
  • 학비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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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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